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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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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 타이어 속의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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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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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경기취재본부 근무로 발령났을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차를 한 대 샀습니다. 보통 주위에서 차를 구입하는 용도처럼 출퇴근이나 레저용이 아니라, 절박한 업무상의 필요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오전엔 성남, 낮에는 양평, 오후엔 의왕에서 취재를 하고 마감시간에 맞춰 기사를 전송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컨대 이동어류판매인이 업무를 위해 당연히 트럭을 구입하는 행위와 비슷한 유형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이제 신경써야 할 일이 하나 늘었던 셈이지요. 대학시절 제 지도교수께서는 미국 유학 당시 아예 독학으로 차량정비를 마스터하셨다는데, 최소한 배터리 방전이나 제네레이터 고장 때문에 고속도로변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일만큼은 없어야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매뉴얼을 자세히 읽었습니다. 읽다보니 이런 얘기가 나오더군요.

“타이어 점검: 타이어의 수명 연장 및 안락한 승차감을 위해 매일 차량 주행전에 타이어 공기압 및 마모 상태를 점검하십시오.”

그리곤 타이어 세 개를 그린 그림이 있었습니다. 왼쪽, 지면에 약간 평평하게 붙은 타이어(양호). 중간, 거의 원형인 타이어(지나치게 높다). 오른쪽, 아주 찌그러진 타이어(지나치게 낮다). 운전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건 싱거울 정도로 당연한 상식이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유치원 시절부터 미술시간에 자동차를 그릴 때면 그렇게 ‘양호한 타이어’를 그린 적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항상 동그랗게 그렸었죠. 원형으로 구멍이 뚫린 삼각자를 갖다대고 그리기도 했고요. 한데, “지나치게 둥근 타이어는 정상이 아니다”란 겁니다.

이런 얘기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었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어디였을까… 고민끝에 출처를 기억해 냈습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나오는 얘기였습니다.

<사문(沙門·승려)이 밤에 가섭불(迦葉佛·과거칠불의 여섯 번째 부처님)의 ‘유교경(遺敎經)’을 소리내 읽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애절해서, 마치 ‘이렇게 깨닫지 못할 바에는 출가나 하지 말 것을 하고 뉘우쳐 중노릇을 그만두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아, 어찌 중노릇 뿐이겠습니까. 어느 직장이든지 필요 이상으로 업무와 관련된 목소리가 ‘애절해지는’ 사람은 있게 마련. 아니, 누구라도 그런 시기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훈련은 전투다, 각 개 전 투.”

<부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예전에 집에, 있을 때 너는 무슨 일을 했었느냐?”>

여기서 ‘집’을 ‘사회’로 바꾸면 갑자기 부처님의 말씀이 마치 예선 군대생활에서 겪었던 중대장이나 주임상사의 말투처럼 보입니다. “너 뭐하다 왔니?” 과거를, 과거의 자신를 돌이켜보려는 모든 질문은 때로 응답자의 마음을 마냥 흔들어놓습니다. 그건 어쩌면 그의 원래 모습에 가까운 초 어린 자아의 형상을 아주 잠시 상기시키면서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시공간적 틀을 조금씩 흔들어놓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흘러간 물을 가지고선 물방아를 돌릴 수 없다.”(벤자민 프랭클린) 아마 그 젊은 중의 눈가에 잠깐 물기가 보였을 것입니다.

조선일보

<사문이 대답했다. “거문고 타기를 좋아했습니다.”

“거문고 줄이 너무 느슨하면 어떻더냐?”

“그래서는 소리가 안 납니다.”

“그러면 줄이 너무 팽팽하면 어떻고?”

“소리가 끊어집니다.”

“줄이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아 알맞을 때는?”

“소리들이 고르게 울립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그렇습니다. 타이어의 원리에서 부처의 말씀이 보입니다. 이 무색무미한 중용(中庸)의 편안한 DMZ에 삶의 안착점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누구나 다 알면서도 결코 쉬이 지키지 못할 그 중간지대. 그러나, 그걸 다 지키고 살면 내가 부처게?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걸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면, 유치원생보다도 못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뻔하게 드러난 사실을 확인전화해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는 공무원들, 차라리 연민의 정이 생깁니다. 원칙을 지키겠다고 강변하던 정당에선 결국 회기 중에 ‘짤짤이’를 한 의원에게 사실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도둑맞은 편지는 그 방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건 오귀스트 뒤팽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지요.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는 건데, 그 사람들은 아예 유(有)를 무(無)로 만들어버리는 신통한 재주라도 있는 척 행동하니 답답한 겁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문이 도(道)를 수행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음씀이 마침 적당하면[調適] 도를 얻을 수 있으려니와, 도를 구함에 있어서 너무 다급할 때는 몸이 지칠 것이고, 그 몸이 지칠 때는 마음이 괴로울 것이고, 마음이 괴로울 때는 수행이 뒷걸음질칠 것이고, 그 수행이 뒷걸음질치고 났을 때는 죄가 반드시 더해 갈 것이다. 오직 마음과 몸이 청정·안락해야만 도를 잃지 않으리라.”>

그렇습니까.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습니까. ‘조적(調適)’ 이 두 글자에 삶의 진리가 다 들어있었던 것입니까. 근데 어떻게 하면 ‘조적’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망집(妄集)과 미혹(迷惑)과 번뇌(煩惱)같은 고차원적인 것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고속(高速)의 세상을 채우고 있는 숱한 데드라인과 질책과 트릭과 속보(速報)들 사이에서 ‘적당한 마음씀’의 지혜로 가기 위해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다급하면 지치고, 지치면 괴롭고, 괴로우면 뒷걸음치게 되는 진리란 결코 처음 들어보는 말이 아니지만, 끝이 시작이 되고 시작이 미궁으로 빠져버리기 십상인 이 암울함 속을 어떻게 청정하고 안락한 ‘태풍의 눈’으로 만들어버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기야, 미투리도 챙기지 않은 채 삼수갑산 멀다 할 수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그 섬은 있는 것일까요. 처음부터 존재하기라도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환영(幻影)이었을까요. 섬이 있었다면, 정말로 섬이 있었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조적’의 아지트를 그 곳에 의탁할 수도 있었을 것을. 근데 정말, 왜 이리 회의가 생기는 것일까 모르겠습니다. 그 ‘섬’이란 거, 그거 자꾸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나 엘도라도 류의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 수행은 본래 혼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둘 이상의 사람이 동시에 대오각성했다는 얘기는 매우 드물죠. 수행을 끝낸 사람보다는 시작한 사람이 항상 많은 법이고.

세월이 흘러 저는 그 차를 팔았습니다. 어느 순간 서울 한복판에선 차가 짐이란 생각이 들었고, 휴대전화 교통 앱을 보며 생각지도 못한 경로를 통해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대단히 편리하다고 흥미진진하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됐습니다. 가끔 등장하는 지하철 빌런들의 모습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만 생겨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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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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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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