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권상연성당 성화·성물 전담한 정미연 작가…"여기서 치유받길"
(전주=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흙을 만지는데 다시 살았다는 기쁨이 용솟음치는 거예요."
한국 최초의 가톨릭 순교자를 기리는 권상연 야고보 성당(전북 전주시 완산구, 이하 권상연성당)의 미술품 제작을 담당한 정미연(68) 작가는 성당에 설치할 성수대(聖水臺) 작업을 시작했을 때의 기분을 이렇게 회고했다.
성수대는 정 작가가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마친 후 권상연성당에 배치할 성물·성화 중 처음으로 작업했던 작품이다.
정 작가는 축성식(祝聖式)을 나흘 앞둔 29일 권상연성당에서 자신의 투병기와 작품 제작 과정을 들려줬다.
권상연 야고보 성당 내부 모습 |
그가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은 2021년 봄이었다.
성당 신축 업무를 담당한 전주교구 박상운 신부와 성당 내 미술품에 관한 논의를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 돌발 상황이 생긴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1기였지만 복강경 수술 후 이어진 12차례의 항암 치료는 상상 이상으로 힘든 과정이었다.
"약이 몸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막 구토가 나요. 먹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쓰레기통을 끌어안고 울면서 신물까지 막 토해냈어요. 이렇게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사람들은 머리칼을 밀었다거나 항암 치료 흔적이 있는 이를 만나면 눈빛으로 '너도 그 힘든 시간을 보냈구나'하고 친구로 생각할 정도예요. 겪지 않은 사람은 알기 어려워요."
권상연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 |
정 작가는 한없는 고통을 겪고 자신이 "새롭게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때 기도를 하면서 '내가 여태까지 만든 십자가는 다 엉터리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주님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제 아픔을 통해서 느끼게 됐으니까요."
항암 치료를 마친 정 작가는 지난해 초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아! 내가 다시 작업을 하는구나' 하는 기쁨으로 받은 에너지가 굉장했다. 성당에 놓을 작품을 만들면서 오히려 내가 치유되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떠올리며 눈을 반짝였다.
박 신부는 정 작가의 건강을 걱정해 기존에 그가 만들어놓은 작품을 몇 개 놓는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작품 소개하는 정미연 작가 |
"신부님이 (설계) 시뮬레이션을 보내주셨는데 성당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다 이미 있는 성물을 놓기는 좀 그렇더라고요. 작가로서도 욕심이 났지요."
그는 청동 형상물, 테라코타, 스테인드글라스, 부조, 회화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했다.
문고리처럼 작은 소품은 물론, 벽면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 한국 최초의 가톨릭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조각상, 거대한 십자가와 못 박힌 예수까지 정 작가가 만든 작품 200여 점이 성당에 배치됐다.
순교자 권상연 조각상 |
이 가운데 절반 정도가 권상연성당을 위해 새로 작업한 것들이다.
박 신부는 정 작가가 "작품 하나를 만들기도 힘든데 짧은 시간에 어마어마한 일을 했다"고 전했다.
관절이 잘 접히지 않는 한쪽 엄지손가락과 살이 딱딱해진 손에서 정 작가가 감내했던 작업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전주교구 측은 국내 성당 가운데 모든 미술품을 한 명의 작가가 신축 때부터 전담해 작업한 것은 권상연성당이 처음인 것으로 파악한다.
국외에서는 야수파의 창시자인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1869~1954)가 프랑스 남부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의 벽화, 스테인드글라스, 기타 성물 등을 두루 제작한 것이 단일한 예술가가 교회의 모든 미술품을 제작한 드문 사례로 꼽힌다.
순교자 윤지충 조각상 |
성당 신축을 추진하던 중 전북 완주군 소재 초남이성지에서 한국 가톨릭 사상 최초의 순교자인 권상연(1751∼1791) 야고보와 윤지충(1759∼1791) 바오로 등의 유해가 발견됐다.
전주교구는 이번에 신축한 성당을 권상연성당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윤지충성당은 작년에 전주시 완산구에 완공됐다.
박 신부의 꼼꼼한 기획과 정 작가의 혼이 결합해 성당은 영적인 분위기가 충만한 공간으로 완성됐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부근에는 예수가 세례받는 장면을 표현한 성수대가 설치됐다. 성수대에서 성전 내 '십자고상'(十字苦像·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표현한 조형물)까지의 거리는 33m다.
그리스도가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윤지충이 33세에 순교한 것을 상징하도록 설계했다고 박 신부는 소개했다.
십자고상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가시관을 쓰고 매달린 예수는 탈골이 된 것처럼 팔이 위로 꺾여 있고 가슴과 복부가 파헤쳐져 있다.
십자가를 조형물로 만드는 대신 십자가 모양으로 창을 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이 십자가 역할을 한다. 허공에 매달린 예수의 뒤로 그의 그림자가 생기도록 조명을 설정했다.
부활을 소재로 한 권상연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
성당 전면 좌우에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조각상을 놓았다.
평소 '한국적인 것의 현대화'를 중시하는 정 작가의 작업 스타일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윤지충은 오른손에 십자고상을 들고 왼손으로 비둘기를 날린다.
상투를 드러낸 권상연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벽에는 권상연과 윤지충이 참수돼 순교한 것 등을 모티프로 한 작품을 비롯해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
성모 마리아가 겪은 7가지 고통스러웠던 사건인 '성모칠고'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제로 한 스테인드글라스도 눈길을 끈다.
권상연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
고통을 딛고 화룡점정(畵龍點睛·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한다는 의미)한 정 작가가 성당 내 예술품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바로 치유다.
"순교라는 주제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저의 경험과 맞물리는 것 같아요. 순교의 아픔을 더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었죠. 인간은 고통을 겪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참회합니다. 우리가 내면의 찌꺼기를 다 쏟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지잖아요. 사람들이 이곳의 영적인 기운으로 치유받고 마음이 가벼워져서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정미연 작가와 박상운 신부 |
박 신부는 순교자 성당이란 공간의 특수성에 주목했다.
"권상연·윤지충의 유해는 이들이 순교한 지 230년 만인 2021년 발견됐어요. 코로나19가 확산해 고통받는 시기에 땅속에 계시던 분들이 선물처럼 오신 거죠. 우리나라 첫 순교자를 통해 하늘의 문이 열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살면서 향해야 할 본향이 어딘지를 느끼며 신앙하기를 바랍니다."
한국 천주교 첫 순교복자 윤지충·권상연의 백자사발 지석 |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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