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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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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의 오마이갓] 교황 앞에서 그가 진땀 뺀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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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18년 홍보맨’ 허영엽 신부, 뒷이야기 페이스북에 실어

조선일보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왼쪽)이 명동대성당 미사 후 휴전선 철조망으로 만든 가시관을 보며 설명을 듣고 있다. 유리 케이스를 든 이가 허영엽 신부. /허영엽 신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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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엔 네 사람이 보입니다. 제일 왼쪽은 누구인지 아시겠지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교황 오른쪽으로는 2014년 교황 방한 당시 통역을 맡았던 예수회 정제천 신부, 염수정 추기경, 허영엽 신부입니다. 지난 2014년 방한 마지막 날 오전,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가 끝난 후의 임시 제의실(祭衣室) 모습입니다. 허 신부가 철조망으로 만든 가시관(冠)이 든 유리 케이스를 들고 있고, 염 추기경이 설명하고, 그 설명을 정 신부가 통역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입니다.

저는 사실 이 사진이 기억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교황 방한 관련해서는 기사 거리가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진은 허 신부님이 최근 페이스북에 ‘홍보 시절’이란 제목으로 올려서 사실상 처음 보게 됐습니다. 허 신부님은 2004년부터 2022년 8월까지 만 18년 동안 서울대교구 홍보를 도맡았던 분입니다. 기업에서는 수십년씩 홍보를 맡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홍보맨’이라고도 불리지요. 그런데 종교계에는 이런 분이 드뭅니다. 허 신부님은 2004년 당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나랑 같이 2년만 고생하자”는 권유에 따라 홍보 업무를 맡아서 종교계에선 보기 드물게 홍보 담당으로 ‘장기 복무(?)’한 분입니다. 종교계에선 유례가 거의 없는 ‘홍보맨’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 허 신부님이 페이스북을 통해 그동안 언론에서 잘 조명되지 않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을 잘 보시면 분위기가 묘합니다. 다른 세 분이 미소를 띤 표정으로 화기애애한 데 비해 허 신부님 얼굴은 굳어 있습니다. 허 신부님은 높은 분 앞이라고 해서 긴장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유리 케이스가 무거워서”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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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김수환 추기경(왼쪽), 정진석 추기경과 함께한 허영엽 신부. /허영엽 신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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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신부님은 글을 참 감칠맛나게 쓰는 분입니다. 그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명동성당 미사는 교황 방한 일정의 마지막 순서였습니다. 미사 후 교황은 바로 서울공항으로 이동해 한국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미사까지 끝난 후 제의실에서 교황은 염수정 추기경에게 예정에 없던 성작(聖爵·미사 때 쓰는 잔)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124위 시복식과 미사 등 준비에 힘쓴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겠지요. 문제는 ‘선물’이 아니라 ‘예정에 없던’이었습니다.

원래 교황의 일정과 의전은 분(分) 단위로 빽빽하게 짜여있고 점검에 점검을 거듭하기에 ‘예정에 없던 선물’은 염 추기경을 비롯한 서울대교구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답니다. 선물은 원래 주고받는 것. ‘답례’가 필수이기 때문이죠. 선물을 받은 염 추기경은 곁에 있던 허 신부에게 자꾸 눈짓(?)을 했답니다. 허 신부는 그 사인(?)의 의미를 알아챘지요. 급하게 답례 선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진땀 나는 상황. 허겁지겁 복도로 나온 허 신부 눈에 복도에 전시된 ‘가시관’이 띄었답니다. 휴전선의 낡은 철조망으로 만든 가시 면류관이었지요. 신자들이 분단을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복도에 설치된 작품이었습니다.

‘에이 모르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허 신부가 그 유리 케이스를 들었더니 마침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들리더랍니다. 임기응변으로 그 유리 케이스를 가지고 제의실로 들어오니 염 추기경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스쳤답니다. 염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 시절 철조망 가시관을 교구장실에도 놓고 집무를 볼 정도로 관심이 많아서 ‘잘 설명할 수 있는’ 작품이었던 것이죠.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던 염 추기경으로서는 한국의 분단 상황을 잘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했지요. 염 추기경은 한참 동안 교황에게 이 작품의 의미를 설명했답니다. 교황도 집중해서 설명을 들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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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왼쪽) 때와 2021년 정진석 추기경 선종 당시 언론 브리핑하는 허영엽 신부. /허영엽 신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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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설명이 길어질수록 유리 케이스를 든 허 신부의 손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답니다. 연속 사진을 보면 손의 각도가 계속 내려가고 있답니다. 유리 케이스가 생각보다 무거웠던 것이지요. 이 사진은 허 신부가 안감힘을 다해 유리 케이스를 들고 있던 순간에 촬영된 것이지요. 다른 분들은 미소 짓고 있지만 허 신부는 힘든 표정을 감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허 신부는 통화에서 “이러다 유리 케이스를 떨어뜨리면 어떡하나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선물 교환’(?)은 무사히, 의미있게 끝났습니다. 다음날 한 신문은 이 사진을 크게 싣고 ‘상당히 의미있는 선물’이라고 ‘대서특필’했답니다. 허 신부님은 이렇게 썼네요. “그래도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는 것 같다. 그것도 큰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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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추기경이 선종하기 전 허영엽 신부에게 선물한 영명 축하 카드. /허영엽 신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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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신부님은 종교담당 기자들에게는 좀 특별한 신부님이었습니다. 보통 가톨릭은 엄숙하고 점잖은 이미지가 많지요? 기자들이 느끼는 것도 비슷합니다. 가톨릭에 관해 취재하려고 하면 “왜 일간지에서 우리 이야기를 알려고 하지?” 이런 반응이 돌아올 때가 많습니다. 허 신부님은 일반 언론과 가톨릭 사이에서 매신저 역할을 해줬습니다. 단적으로 가톨릭 사제의 칼럼이나 원고가 필요할 때 허 신부님께 기자들이 부탁하면 발벗고 도와주었습니다. 섭외가 여의치 않으면 본인이 직접 써주었습니다. 허 신부님이 이렇게 언론 친화적이었던 것은 본인이 신학생 시절에 학보사 기자를 했기 때문입니다. 허 신부님은 “당시에도 학보에 글 받는 것이 무척 힘들어서 ‘나중에 나는 원고 청탁 들어오면 잘 써줘야지’ 생각했다”고 합니다.

2004년 허 신부님이 홍보를 맡은 얼마 후부터 갑자기 서울대교구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보도자료가 쏟아진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안은 전혀 일간지로서는 기사 거리가 안 되는 것이었지만 한동안 ‘보도자료 홍수’는 계속됐습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당시 홍보국은 신입 직원을 뽑았습니다. 허 신부님은 새 직원들에게 “보도자료를 많이 써라”고 지시했답니다. 여러 종류의 보도자료를 쏟아내다 보면 언론이 관심을 갖고 취재하고 추가 자료를 요청하는 사례가 생기겠지요. 직원들이 직접 언론의 피드백을 느껴보면서 ‘기사에 대한 감(感)’을 익혀보라는, 허 신부님 나름의 교육법이었던 것입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대교구 홍보국 직원들의 ‘취재력’은 일취월장했습니다. 그런 준비와 연습은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과 2014년 교황 방한이라는 큰 일이 닥쳤을 때 큰 도움이 됐음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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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8년간 맡아온 '서울대교구의 입' 역할을 놓으며 본지와 인터뷰한 허영엽 신부.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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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신부님은 페이스북에 ‘홍보 시절’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교구 홍보 18년 동안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은 에피소드들을 틈틈이 기억을 떠올려 보고 싶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현재 2회까지 실렸는데, 벌써 다음 이야기들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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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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