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4 (화)

"제발 가지 마세요"…영동 60만명, 심장 전문의 2명이 맡는다 [심장질환 진료 붕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부천세종병원 의료진이 심혈관질환자에 혈관조영술을 하는 모습. 부천세종병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선생님 제발 가지 말아주세요.” “안 가실 거지요.”

강원도 강릉의 한 상급종합병원 심장혈관중재시술 의사 A교수는 진료실을 나가는 환자에게서 이런 읍소를 자주 듣는다. 이 병원 심장혈관중재시술 전문의 6명 중 4명이 올 1, 2월 갑자기 병원을 그만두고 서울·수원·평택 등지로 떠났다. 병원 측은 야간과 주말, 공휴일 급성심근경색 환자 진료(중재시술)를 중단했다. 허벅지 혈관으로 풍선이나 그물망(스탠트)을 삽입해 막힌 심장 혈관을 뚫어야 목숨을 건진다. 그동안 이 병원은 영동지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응급시술을 해왔다. A 교수는 “의사 둘이 낮에 시술하고 외래환자를 진료하는 것만으로 버겁다. 당직(병원 대기)이나 온콜 당직(전화 대기)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야간·주말 진료를 닫자 영동지역의 응급 환자는 대관령을 넘어 원주·춘천으로 간다. 급성심근경색(심장마비)는 화급을 다투는데, 1~2시간 지체된다. 자칫 골든타임(2시간)을 놓칠 수도 있다.

이 병원은 강원도 최북단 고성군에서 경북 울진군까지 영동지역 60만명을 맡아왔고 한 해 150건 이상(주로 야간)의 중재시술을 해왔다. 그런데 이게 중단되면서 영동지역 주민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병원 측은 또 경증환자는 동네병원에 다니도록 조치했다. 심장병 노모(86)의 아들 함모씨는 “두 달 전 병원 갔더니 담당 의사가 없어졌더라. 건강검진 의사한테 약 처방을 받았다”며 “의료 공백이 생긴 건데 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훨씬 힘들어져서 굉장히 불안하다”고 말했다. 어떤 환자는 병원 측에 “의사를 구하면 다시 불러달라”고 신신당부 한다. 원주나 춘천지역 병원도 몸살을 앓는다. 원주 세브란스병원 측은 “환자가 10~20% 늘었는데 영동지역에서 온 환자”라고 말한다.

소아청소년과에서 시작된 필수의료 붕괴가 심혈관질환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장혈관 중재시술 또는 수술 의사가 대형병원에서 속속 이탈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서울에서도 나타난다. 올 3~5월 노원구 대형병원 한 곳에선 심장중재시술 전문의 2명이 사직하고 1명이 해외연수를 떠났다. 다른 대형병원은 1년새 2명이 그만뒀다. 두 병원의 야간·주말 진료가 중단됐다. 다른 데로 옮긴 의사는 “고령화 때문에 환자가 늘어 업무량이 급증하면서 더는 버티기 힘든데도 필수의료 지원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경북 경주의 한 대학병원도 2월 심장 의사 3명 중 1명이 퇴직하면서 야간 응급환자는 대구·울산으로 간다. 이 병원 관계자는 “심장질환은 골든타임이 중요하고 24시간 대비해야 하는데, 우리 인력으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비슷한 상황인 충북 충주환자도 원주나 청주로 간다.

진료체계는 무너지는데 심혈관질환은 사망자는 증가한다. 2014년 2만6588명에서 2021년 3만1569명으로 늘었다(통계청). 이 병은 2014년부터 한국인 사망원인 2위에 올라있다. 심장혈관 환자는 2017년 87만여명에서 지난해 103만명으로 늘었다(건강보험심사평가원). 가톨릭의대 예방의학과 김석일 교수 추계에 따르면 흉통·호흡곤란·실신 등의 심혈관 응급환자는 36만여명에서 2032년 60만여명으로 늘어난다. 반면 신규 심장내과 전문의는 10년 전 62명을 정점으로 줄더니 지난해 42명(심장혈관중재 의사는 28명)으로 떨어졌다. 전국 상급종합병원 중 심장내과 전임의(펠로, 전문의 취득 후 세부분야 수련하는 의사)가 한 명도 없는 데가 17곳, 1명이 9곳이다. 펠로를 마쳐도 교수로 남지 않는 경우가 늘어난다. 김석일 교수는 올해 심장혈관중재 의사가 이미 36명 부족하고, 2032년에는 부족 의사가 561명에 이른다고 추계했다. 배장환 대한심장학회·심혈관중재학회 보험이사(충북대병원 공공부원장)는 “지금 당장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4~5년 내 전남·충북·강원 순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신재민 기자



응급진료에 구멍이 생기니 지난해 응급실을 찾은 심근경색 의심환자 1329명이 다른 데로 전원됐다(중앙응급의료센터). 충북·전북·충남·강원·경북·전남 순으로 전원비율이 높다. 기초단체 중에서는 강원도 삼척, 충남 홍성·서산, 광명 등이 높다. 초응급환자는 가슴을 열어 심장혈관 수술을 한다. 심장혈관흉부외과 의사 몫이다. 올 3월 현재 1162명. 아직은 매년 조금씩 증가한다. 다만 363명이 심장수술과 무관한 동네의원에, 73명이 요양병원에 근무한다.

심장 의사가 대형병원에서 이탈하는 이유는 과도한 업무, 당직 및 온콜 대기 부담 가중,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 소송 위험 등이다. 서울 대형병원의 한 교수는 “콜을 받고 병원에 나가면 수당이 5만원이라도 나오지만 나가지 않으면 대기수당이 없다. 간호사·방사선사 등은 법에 따라 반나절 쉬지만 의사는 새벽 시술하고도 오전에 80여명의 환자를 진료한다”고 말한다. 박덕우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심장내과 의사가 고되지만 목숨을 살리는 짜릿한 분야라고 평가받는 시절이 지났다”고 말한다. 배장환 교수는 “워라벨을 중시하는 젊은 의사 기피 풍조 확산 탓에 힘들어진 50대 전후 교수에게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고 1명이 빠지면 우르르 떠난다”며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이에스더·황수연·김나한·채혜선·남수현 기자 ssshin@joongang.co.kr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