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꿨던 광복의 꿈은 가족에게 회한으로 남았다. 상해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소속으로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밑에서 한반도 진입을 위한 한미합작특별(OSS)훈련을 받은 공로로 1999년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고(故) 윤태현(1919~1950) 소령의 양자, 윤덕한(73)씨가 아버지의 사진을 들어 보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10대 때 중국 시안으로 건너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한 뒤, 중국전시간부훈련단 내에 특설된 한국청년특별훈련반에서 훈련을 받은 윤 소령은 광복 후 이범석 전 총리와 함께 귀국해 육군 소위(육사 7기 특별반)로 임관했다. 8사단 21연대 1대대장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그는 1950년 이후 가족들과 소식이 끊겼다.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겠거니 했지만, 사망 통지서는 날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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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중 즉결처분된 소령…“명령 불복종”
윤태현 소령의 양자인 윤덕한 씨가 세종시 자택 앞에서 윤 소령의 이름이 적힌 육군 7기 동기생 수첩을 들고 있다. 이병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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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소령이 풍기영주 전투 도중인 1950년 7월 17일, 명령 불복종으로 즉결처분을 당했다’는 신문 기사가 나온 건 1970년이었다. 남하하는 북한군 8사단, 12사단을 막기 위해 당시 국군 8사단은 경북 풍기~영주~안동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투를 벌였는데, 북한군이 야습을 하자 윤 소령이 무단으로 조급한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이유로 군사재판 없이 총살당했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경악했다. “어디 가 말하기도 창피한 거 아니요, 전시에 죄를 지어서 총살당했다니…역적이지.” 윤덕한 씨가 회상했다. 유해라도 수습하기 위해 가족들이 21연대장이었던 김용배(1923~2006) 전 육군참모총장을 찾아갔지만, 돌아온 건 “돈을 원하냐”는 냉대였다고 한다. 유해도 유품도 없어 장례는 치르지 못했다. 그 사이 윤 소령의 부모와 형제들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사망한 게 밝혀지면 제사라도 치르게 하라”는 윤 소령 부모의 유언대로, 윤 소령의 조카였던 윤씨는 1969년 19살의 나이에 윤 소령의 양자로 호적을 옮겼다.
윤 소령의 이름이 다시 세상에 나온 건 1998년, 윤씨가 윤 소령의 무공훈장을 48년 만에 받아보면서였다. 1950년 4월, 6·25 발발을 앞두고 윤 소령이 국내에 침투한 북한군을 소탕한 공로로 그해 말 서훈된 무성화랑무공훈장이었다. 윤씨는 윤 소령의 공적을 더 확인하기 위해 군에서 윤 소령의 병적 증명서를 발급받아 보고는 의구심이 생겼다. 윤 소령이 사망해 제적된 것이 아닌, 사후인 1950년 8월 파면돼 제적된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파면은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수위의 징계다. 윤씨는 “파면이 됐는데도 훈장이 나왔으니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고 했다. 충남 공주시 토박이로 농사를 짓고 살던 윤씨가 사비를 들여가며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까지 와 6·25 전쟁 기록물들을 들여다보고, 전직 군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윤 소령의 사망 과정에 대한 진실을 규명해달라”는 신청을 받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 윤 소령이 연대장이었던 김용배 전 총장의 위법한 즉결처분으로 사망했다고 결론 내렸다. 과거사위는 “전투지휘자에게 즉결처분권을 인정한 건 1950년 7월 26일에 발령된 육본 훈령 제12호가 유일하다”며 “피해자의 처형 일시는 1950년 7월 17일이라 피해자 처벌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전쟁 중이더라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근본인 생명권을 법적 근거 없이 즉결처분한 것은 명백하고도 위험한 인권침해”라고 명시했다. 윤씨가 모은 『대비정규전사』등의 기록이 과거사위 결정의 주요 근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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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지나 나온 순직 처분…유족 “살인자에 면죄부”
윤덕한 씨의 자택 안에 윤태현 소령이 서훈받은 무공훈장증이 걸려 있다. 이병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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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연대 3대대의 한 중대장은 과거사위에 “풍기전투는 몸으로 막는 전투여서 작전명령을 어겼다는 내용은 지금은 말할 수 있지만, 당시로는 매일 지시와 작전명령 위반을 밥 먹듯이 하고 있었다”며 “장비의 열세인 우군이 북괴군을 방어할 수 있는 건 인적자원밖에 없었다. 모두 명령 위반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진술했다. 당시 21연대에서 헌병으로 근무했다는 김모(1927년생)씨는 “장작을 운반해 그 위에 (윤 소령의) 시체를 놓고 휘발유 한 통을 부어 화장을 하는데, 연기가 하늘로 솟아올라 적에게 포착이 돼 수십 발의 포탄이 쏘아져서 연대본부는 이동하고 윤 소령의 시체는 그대로 둔 채 후퇴했다”는 진술서를 써 윤씨 앞으로 남기기도 했다. 일각에선 일본군 출신인 김 전 총장과 광복군 출신인 윤 소령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는 이에 따라 2021년 윤 소령을 전사자로 재심사하라고 국방부에 권고했지만,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지난해 9월 윤 소령의 죽음에 순직 판정을 내렸다. 군인사법은 ‘타의 귀감이 되는 고도의 위험을 무릅쓴 직무 수행 중 사망한 사람’이 순직 I형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반면 ‘전투 또는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 중 사망한 사람’은 전사자로 분류된다. 윤씨는 “살인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며 “전쟁 중 위법행위로 사망했기에 순직이 아닌 전사로 인정해야 한다”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지만 최근 각하되자 인권위에 행정심판을 재차 청구한 상태다. 윤씨는 군이 사망 사실과 이유를 수십 년간 유족에게 통지하지 않고 유해를 방치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현재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이 진행 중이다.
윤태현 소령의 생전 모습. 이병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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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게 윤 소령의 생전 사진을 가보처럼 보여주던 윤씨는“난 농사만 짓던 사람인데, 그동안 어떻게 이렇게까지 조사를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상님의 영혼이 씌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 가지 궁금한 건 나라가 왜 내가 이렇게 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느냐, 그겁니다….” 윤씨가 말끝을 흐렸다.
이병준 기자 lee.byungju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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