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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北 “美日 믿어선 안 된다” 南 “앞잡이는 안될 것”…7·4 남북공동성명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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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냉전질서 재편…남북 첫 만남, 상호 탐색전

신분 위장해 판문점에서 만나…北 “고위급 접촉” 제안

北 “미군 철수 왜 반대하나”…南 “남침한 당신들 책임”

남북회담문서 공개…7·4 남북공동성명 막전막후

헤럴드경제

[남북대화사료집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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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18년만에 남북이 판문점에서 처음으로 마주앉았다. 각자 적십자회담 대표를 가장해 만난 남북 당국자들은 대화를 통해 신뢰를 구축하며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확인했다. ‘오해’를 풀지 못하면 ‘외교’가 된다는 말에 양측은 공감했고, ‘조국통일 3대 원칙’(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일 통일부가 공개한 1971년 11월부터 1979년 2월까지 정치 분야 남북회담문서 총 2권(1678쪽)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공식 개최된 남북 당국 간 접촉과 대화를 통해 7·4 남북공동성명이 성사되기까지 생생한 장면이 담겨있다. 남북회담문서 공개는 2022년 두 차례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1971년 9월10일부터 판문점에서 개최된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은 북측이 정치적 문제를 제기해 난항을 겪었다. 이에 1971년 11월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를 가장해 남측에서는 정홍진이, 북측에서는 김덕현이 비밀접촉을 했다.

첫 번째 실무자급 비밀접촉에서 김덕현은 정홍진에게 “가장 높은 데서 신임하는 사람들이 비밀접촉을 하면 어떻겠나”라고 제안했다. 3차 접촉에서야 양측은 자신의 정확한 신분을 밝히며 본격적인 대화를 이어간다. 김덕현은 “나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담당 책임지도원”이라고 밝혔고, 정홍진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은 “나의 현직은 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이고, 전직은 대통령 직속기관의 국장”이라고 밝혔다.

1972년 5월2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비밀 방북해 평양에서 김일성 국방위원장의 동생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과 만났다. 전쟁 후 일상을 복원한 평양의 모습에 이 부장은 “정말 놀랍게 발전하고, 건설되고 있는 것을 보고 같은 민족으로서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전후 첫 고위급 회담인 만큼 양측은 6.25 전쟁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김 부장는 “이남에서 미제국주의의 군대가 철수하겠다는데 대해서 왜 남쪽은 이를 반대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이 부장은 “그것은 북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불신이다”며 “미군을 한국 내에 끌어들인 것은 바로 당신들이다. 미군이 나가고 없을 때 남침해왔지 않나”라고 말했다. 이어 “이제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하게 하는 것도 바로 당신들의 책임”이라며 “그것은 이제는 다시 남침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 초는 세계 질서가 재편하던 시기였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중국을 비밀 방문(1971년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하고,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1972년 닉슨-마오쩌둥 회담)을 했다. 급변하는 냉전 질서와 동북아 정세에 대한 남북의 솔직한 입장이 나타난다.

김 부장는 “일본과 미국이 (남한을) 추켜서 쳐들어올 것으로 알았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로 생각했다”며 “미국과 일본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이 부장은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는 되지 않는다. 그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 자주노선을 취하고 있다”며 “옛날엔 사대주의 때문에 망했다. 우리는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가 절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달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미국이나 일본이 싸움을 하라고 추켜세우더라도 우리가 자주적으로 싸움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싸우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자주적으로 싸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들이 반대하더라도 우리는 싸울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번 자료를 통해 북측에서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당초 남북 정상 간의 공동 합의서로 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72년 6월 실무자급 회의에서 북측은 “우리 법규에 공동합의서라고 하면 조약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전권위임을 받은 대표들 사이에 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공동합의서에 귀측은 박(정희) 대통령의, 우리는 김일성 수상의 책임에 의해 되는 것으로 썼는데 이 부장의 문서에는 전권위임이 아닌 것으로 돼 있다”고 말했다. 이에 고위급 회담문인 만큼 ‘공동성명’으로 제안했고, 남측이 이를 받아들였다.

silverpap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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