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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르포]직원들 퇴근한 부산 중소 조선소…사장실 불만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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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꿈 강소기업]①다가오는 납품기일…홀로 속 졸이는 중소기업 사장

[편집자주] 할일이 쌓였는데 직원들 퇴근은 시켜야 한다. 외국인은 몇 달 만에 회사를 옮겨달라 한다. 적어도 1~2년은 가르쳐야 직원 구실하는데 신입 사원은 몇 달이면 나간다. 한때 강소기업을 꿈꿨지만 사람조차 구할 수 없다. 처우를 개선해달라지만, 한낱 중소기업 사장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다. 사람이 없어 쓰러지는 중소기업들, 그 해법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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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밤 8시쯤. 직원들은 다 퇴근했는데 부산 모 중소조선소 사장 이모씨 사무실만 불이 안 꺼졌다. 배 6척 신주 또는 수리를 하고, 출하 기일이 다가오는데 아직 작업을 마치지 못했다. 조선업은 변수가 워낙 많아 일주일 연장근로 시간 12시간을 계획에 따라 배분하기 불가능에 가깝다. 출하 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수천만원, 수억 지체상금을 물어야 한다. 이씨는 거의 매일 프로젝트 걱정, 선주사와 전화를 하느라 밤 늦게 퇴근한다./사진=김성진 기자.


지난 15일 밤 8시쯤 어둑한 7000평 부산 사하구 중소 조선소를 사장실 불빛이 혼자 밝혔다. 사무실 건물 앞 배 여섯척이 파도 소리 따라 몸을 흔들었는데, 어둑해 잘 안 보이지만 가만 보면 검붉은 뼈대를 드러냈거나 철판을 뜯어낸 모습이었다. 아직 건조 중이거나 수리 중인 배들이었다.

조선소 직원 80여명, 협력업체 직원 200여명은 오전 8시 함께 출근해 오후 5시면 퇴근했다. 그마저도, 이 바닥에 잔뼈 굵은 협력업체 직원들은 오후 4시~4시30분쯤이면 알아서 배에서 내려와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집에 갈 준비를 한다. 사장만 속이 탔다. 배들의 출항 날짜는 카운트다운하듯 성큼성큼 다가왔다.

부산 사하구는 이렇게 이른 밤 불 꺼지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에야 거제도가 조선업의 대명사지만 1960년대 한국조선공사가 최초의 현대식 조선소를 개소하고 60년 넘게 사하구는 늦게 자고 일찍 깨는 곳이었다. 지금도 수리 또는 작은 배를 만드는 중소 조선소가 많고, 조선 기자재 70~80%가 좁은 바다 건너 영도에서 만들어진다. 용접하고 철판 가는 불꽃이 사하구 밤바다를 밝혔다.

밤바다는 주52시간제가 시행되고 어두워졌다. 조선업은 신주·수리 주문량의 변동이 커 일꾼 중 일부만 조선소가 직접 고용하고 나머지는 협력업체에 속해 여러 조선소가 돌아가며 부린다. 출항 날이 다가오면 잔업을 꼭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협력업체 직원 동의를 받아야 한다. 직원 4명 중 3명꼴로는 그냥 집에 간다.

조선소의 관리자 한명은 "다른 조선소는 협력업체에 이미 대금을 지급했는데 직원에 따로 웃돈을 줘서 잔업을 시킨다더라"라며 "주52시간은 조선업과 맞지 않는 제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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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부산 사하구의 중소 조선소 수리 현장. 작업자가 배 아래 부분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다./사진=김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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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2시간제 시행 전, 후 조선소의 작업량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부산은 부동항을 찾아 내려온 러시아 원양어선들의 해외 거점이다. 자연스레 원양어선 수리 수요가 많다. 수리 기간은 배마다 다르다. 짧게는 이틀, 길게는 수개월이 될 수도 있다. 같은 것 한가지는 출항 직전에 작업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점이다. 수리를 1차로 마치고 반드시 시험 운행을 하는데, 이 과정에 소음, 출력 등 사소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펌프나 엔진이 멈출 수도 있다.

시험 운행 후 추가 작업량은 작업 반장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조선소 관계자는 "변수가 너무 많다"고 했다. 문제없이 잘 넘어가면 연장 근로를 안해도 되지만 그런 경우는 수년에 한 번꼴이다. 수십년 동안 부산 조선소들은 출항을 앞두고 길게는 사흘씩 철야 근무를 했다. 그렇게 무사히 배 출항을 시키면 며칠간은 여유롭게 쉬었다. 이것이 그들의 '작업 사이클'이었다.

지금은 일주일 연장 근로가 12시간으로 제한됐다. 매주 금요일 점심시간이면 경영지원실에서 각 작업반장에게 근로자마다 남은 연장근로 시간을 알려준다. 매번 출항을 앞두고는 남는 연장근로 시간이 없어 빠듯하다고 하다. 출항을 앞두고 작업반장들 스트레스가 심해 탈모까지 오는 경우도 있다.

출항이 늦으면 조선소는 '지체상금'이란 걸 낸다. 계약 대금의 0.075%~0.01%을 패널티로 물어주는 개념이다. 계약 대금은 수십억, 수백억원에 달해 지체상금은 수천만원, 많게는 1억원 이상씩 되는데, 금액이 하루당 부과된다. 출하가 늦으면 지체상금은 늘어난다. 사장도 협력업체 사장들에 전화하고, 선주사들에 사정을 설명하느라 야근을 한다.

작업반장들은 작업 초기에 쓰지 못한 연장근로 시간이 떠오른다고 한다. 조선소 임원은 "연장근로 총량을 늘리겠다는 것은 아니고 유연하게 쓰게는 해주면 좋겠다"며 "조선업은 특성상 작업이 불규칙하게, 출항 직전에 과하게 몰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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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 결함이 없는 경우에도 선주사들이 약정해놓은 출항 기일을 앞두고 토요일, 일요일에 배를 내달라는 경우도 있다. 화물선이나 어선이나 하루라도 더 굴려야 선주사는 돈을 더 벌기 때문이다. 계약상 거절할 수도 있지만, 중소 조선사로서 영업 전략상 그럴 수 없다.

당장 지난달에도 출항을 앞당겨달라는 요구가 두번 있어 한번은 거절했고, 한번은 결국 들어줬다. 이럴 때면 주말에 8시간 이상씩 연장 근로를 추가로 해야 한다. 조선소 직원은 "이런 변수들 때문에 어떤 조선소는 주52시간을 지키지 않고, 바싹 일했다가 과거처럼 출항을 하고 나면 쉬는 시간을 주는 식으로 일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해 4월 중소제조업 555개 사를 조사하니 30~49인 기업의 52.2%, 50~299인 기업의 52.6%가 '주52시간제 준수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32.3%가 "사전 주문 예측이 어렵다"는 점을 이유로 꼽았다. 중소기업들은 협력사 구조로 대기업 주문을 받아 납품하는 경우가 많은데, 직원들 연장 근무는 유연하지 않고 주문은 촉박하게 들어오니 주문을 포기한다는 기업도 적지 않다.

가장 큰 어려움은 구인난(39.6%)이었다. 채용 공고를 내도 온다는 구직자가 없다. 단순한 처우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부산 조선소는 용접공에 하루 일당 18만원, 많게는 25만원을 주는데 온다는 사람이 없어 막내 직원이 47세, 최고령자가 78세다. 조선소 관계자는 "기술을 배우는 젊은이가 없다"고 했다.

부산=김성진 기자 zk00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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