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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흠집이 반가운 사람들 “그거 제가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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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에 인기 폭주 ‘리퍼’ 제품


# 50대 직장인 A씨는 코로나19를 거치며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자 좋은 TV를 구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심도 잠시,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A씨는 이윽고 고민에 빠졌다. 원하는 제품 가격이 너무 비쌌던 탓이다.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선뜻 몇백만원에 달하는 가격을 지불할 자신이 없었다. A씨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직원은 매장에 전시돼 있던 ‘리퍼’ 제품을 할인가에 구매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전시용으로 쓰였던 제품으로 신제품보다 가격이 30%가량 저렴했다. 외관과 성능은 신제품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A씨는 직원이 추천한 제품을 별다른 고민 없이 사들였다.

“확실한 가격적 메리트가 있어 만족한다. 성능만 문제가 없다면 굳이 신제품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에도 리퍼 제품을 구매할 의사가 있다.”

올해 들어 급격히 인기를 끄는 상품이 있다. 바로 ‘리퍼’ 제품이다. 리퍼는 ‘다시 닦는다’는 의미를 가진 영어 동사 ‘Refurbish’에서 가져온 말이다. 구매자의 단순 변심으로 반품된 상품, 성능에 큰 문제가 없는 초기 불량품, 전시 제품, 미세한 흠이 있는 제품 등을 정비를 통해 다시 판매하는 상품을 통칭해 가리킨다.

과거에는 리퍼 상품에 대한 선호도가 낮았다. 정비를 마쳤다지만, 어떤 결함을 안고 있는지 소비자로서는 제대로 알 길이 없었던 탓이다. 예를 들어 매장 전시용으로 쓰였던 TV의 경우, 기기 수명이 신제품보다 월등히 낮다. 큰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무턱대고 하자가 있었던 상품을 사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리퍼 상품에 대한 인식이 바뀐 계기는 경기 침체다. 물가가 급격히 오르고, 소비 여력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리퍼 제품’에 주목하는 소비자가 급증했다. 시장조사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리퍼비시 제품 관련 U&A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77.6%가 리퍼 제품을 구매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74.8%는 향후에도 리퍼 제품을 구매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경이코노미

리퍼 제품이 인기를 끌면서, 쿠팡은 반품 상품만 전문적으로 파는 ‘반품마켓’을 만들었다. (쿠팡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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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칫거리서 ‘효자 상품’으로

반품 물건 이제는 귀하신 몸

리퍼 상품이 인기를 끌면서 기업들은 관련 상품을 적극 내놓는다. 특히 그동안 반품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유통업계는 쾌재를 부른다. 악성 재고였던 반품 물건이 소비자를 끌어오는 새로운 효자 상품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커머스 강자 쿠팡은 지난 2월 ‘반품마켓’을 선보였다. 반품된 물건을 모아 싸게 판매하는 반품 제품 전문관이다. 쿠팡이 포장 상태, 구성품 검수, 외관 상태, 작동 테스트를 거쳐 물건을 분류한다. 상품 등급은 4개(미개봉, 최상, 상, 중)로 나뉜다. 전자 제품·컴퓨터, 디지털 상품은 최대 40%까지, 의류와 신발은 최대 70%까지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한다. 성장세는 가파르다. 서비스 시작 3개월 만에 이용 고객이 35% 증가했다.

티몬은 올해 4월 리퍼 상품과 소비기한 임박 상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리퍼임박마켓’을 공개했다. 리퍼 상품과 소비기한 임박 상품 매출이 급증하자, 해당 제품만 판매하는 전문관을 내놓은 것.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5개월 동안 티몬의 리퍼·기한 임박 상품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18% 올랐다.

11번가는 4월 3일 리퍼 전문관 ‘리퍼블리’를 새로 선보였다. 뉴퍼마켓, 리씽크 등 국내 대형 리퍼 전문몰과 손을 잡았다. 리퍼블리는 총 6개 카테고리로 물품을 세분화했다. 노트북, PC, 태블릿, 스마트폰부터 TV, 건조기, 계절 가전, 주방 가전 등 가전제품과 함께 침대, 소파, 옷장, 주방용품, 건강, 취미, 도서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한다. 11번가는 올해 연말까지 리퍼 판매자를 2배 이상 늘릴 계획이다. 현재 전문몰을 비롯해 리퍼 전문 셀러 등 약 170곳의 판매자가 입점한 상태다.

롯데하이마트는 전시 상품 판매를 위해 리퍼 플랫폼을 적극 활용한다. 이미 2021년 10월부터 온라인 쇼핑몰과 앱에 중고거래 플랫폼 ‘하트마켓’을 도입했다. 해당 플랫폼은 도입 후 100만명이 넘는 이용자가 방문했다. 1만2000개의 상품이 등록됐고, 이 중 8000개가 판매 완료됐다.

리퍼 열풍 한동안 계속될 것

하나의 소비 트렌드로 자리 잡아

전문가들은 리퍼 제품 소비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을 것이라 내다본다. 불황이 끝나고 경기가 회복해도 리퍼 제품 인기는 계속된다는 분석이다.

우선 소비 행태가 변했다. 과거에는 좋은 제품을 사서 오랫동안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때문에 비싼 돈을 주더라도 상태가 좋은 물건을 사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소비 트렌드가 바뀌었다. 빨리 소비하고 빨리 바꾸는 게 대세가 됐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소비자의 제품 구매 행태를 보면, 오랫동안 하나의 물건을 쓰지 않는다. 유행이 바뀌면 금세 다른 것으로 교체한다. 때문에 구매할 때 부담이 적은 저렴한 상품을 선호한다. 리퍼 제품은 가격이 저렴해 구매 결정 시 발생하는 심리적 부담감이 적다. 소비 유행이 바뀌기 전까지는 리퍼 제품 인기가 상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력 소비 세대가 바뀐 영향도 크다. 소비 시장 큰손으로 군림하는 20대와 30대는 리퍼 상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2030세대는 제품이 멀쩡히 돌아가면, 조그만 흠집 정도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성능만 똑같다면 가격이 저렴한 리퍼 제품을 선호하는 게 당연하다. 또 리퍼 제품 소비를 통해 ‘자원을 아껴, 환경에 도움이 되는 소비를 했다’는 만족감까지 얻는다”고 설명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리퍼 제품의 인기가 계속되면 나쁠 게 없다. 제조 기업은 리퍼 제품을 찾는 손길이 많아질수록 처치가 곤란한 불량품 재고에 대한 부담이 줄어든다. 유통 기업 역시 반품된 물건을 소화할 새로운 ‘시장’을 얻게 된다.

“(리퍼 제품) 시장 규모가 커지면 기업 입장에서 안정적인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시장, 판매 채널이 생기게 된다. 꾸준히 키우려고 하는 게 당연하다. 합리적인 구매 의사 결정을 하는 고객층의 특성을 분석하고, 관련 상품을 적극 내놓는 흐름이 이어질 것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의 분석이다.

리퍼 상품 구매 시 주의점은?
싸다고 무턱대고 사지 마라…점검 꼼꼼하게
리퍼 제품도 결국에는 ‘하자’가 있던 물건이다. 싸다고 무턱대고 사들이면, 신제품을 사는 것 보다 못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물건을 구매하기 전 크게 3가지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반품이 된 이유, AS 보증 기간, 리퍼 제품을 판매하는 곳의 평판이다.

우선 물건이 왜 반품됐는지 알아야 한다. 물건이 반품되는 이유는 소비자의 단순 변심, 불량, 파손 등 여러 가지다. 반품 이유에 따라 제품 상태는 천차만별이다. 단순 변심으로 반품된 물건은 사실상 신제품에 가까운 상태를 자랑한다. 다만, 이 경우 할인율이 2~10% 수준으로 다른 리퍼 제품에 비해 떨어진다. 불량이나 파손은 이미 기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제품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불량이 있었고, 파손된 이유는 무엇인지 물건을 구매하기 전에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AS 보증 기간은 필히 확인해야 한다. 신제품에 비해 AS 보증 기간이 짧은 경우가 다반사여서다. 싼 가격에 물건을 구매했다 무상 AS 기간이 지나 막대한 수리비를 지출하는 사례가 적잖다. 잔고장이 잦은 전자 제품의 경우 AS 기간이나 방법 등을 잘 확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리퍼 제품을 판매하는 곳의 평판이다. 리퍼 제품 판매는 제조사보다는 유통사에서 자주 이뤄진다. 제조사가 판매하는 리퍼 제품은 정식 부품을 활용하고, 제조사가 직접 상태를 확인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다. 그러나 유통사의 경우 역량이나 평판에 따라 제품 상태가 천차만별이다. 제품을 판매하는 곳이 평소에 이름을 듣기 힘든 곳이었다면, 구매하지 않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13호 (2023.06.14~2023.06.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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