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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보수 우위' 미국 연방대법원이 웬일?... 흑인 유권자들 손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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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4로 "앨라배마주 게리맨더링 위법" 판결
공화당 우세 주, '선거구 재조정' 제동 걸릴 듯
한국일보

조 바이든(앞줄 오른쪽 세 번째) 미국 대통령이 참정권을 요구하는 흑인들을 유혈 진압한 '피의 일요일' 58주년을 맞아 3월 5일 흑인 인권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사건 현장인 앨라배마주 셀마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에서 묵념하고 있다. 셀마=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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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유권자의 투표권 침해' 논란을 불렀던 미국 앨라배마주(州)의 선거구 획정은 위법하다는 미 연방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인종차별적 게리맨더링(특정 정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획정하는 행위)에 제동을 건 것이다. 현지에서는 "2024년 대선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중요한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앨라배마주, '흑인 차별' 게리맨더링 위법"


8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미 연방대법원은 이날 앨라배마주 선거구 획정안이 인종차별을 금하는 투표권법 제2조 위반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하급심 판결을 대법관 5대 4 의견으로 유지했다. 앨라배마주를 상대로 소송을 낸 흑인 유권자이자 비영리단체 '앨라배마 포워드'를 이끄는 에반 밀리건 사무총장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번 판결의 골자는 앨라배마주의 흑인 인구 비율이 4분의 1 이상(27%)인데도, 이들의 표심은 투표 결과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도록 게리맨더링 됐다는 것이다. 선거에 유리하도록 '흑인 동네'와 '백인 동네'를 구획하는 건 미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로 꼽힌다. 미국은 인구센서스에 따라 10년마다 주의회 주도로 선거구를 재편한다. 선거구 획정이 당파적 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 이유다. 여기에다 인종차별적 관행까지 더해지면서 흑인 유권자의 투표권 침해로 이어졌다.

공화당이 장악한 앨라배마 주의회는 2021년 총 7개인 선거구 중 한 곳에 흑인들을 몰아넣었다. 기형적 선거구 획정의 결과,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나머지 6곳 선거구를 휩쓸었다.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흑인 유권자의 선거권이 의도적으로 배제된 셈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지지자들이 2020년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 했던 가운데, 이런 시도는 공화당 우세 지역을 중심으로 잇따랐다. 트럼프 행정부 때 연방대법원마저 '보수 우위' 구도로 재편되면서 우려는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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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대법원 구성. 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 성향으로 분류된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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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연방대법원 판단은 상당히 의외라는 분석이 많다. 보수 성향 대법관이 6명, 진보 성향 대법관이 3명인 현 구도로 볼 때, '보수 편향' 대법원은 "인종 중립 원칙으로 선거구를 조정했다"는 앨라배마주 주장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수'로 분류되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브랫 캐버노 대법관이 흑인 유권자 편에 서면서 '5대 4'라는 결과가 나왔다.

미 시민사회는 잔뜩 고무된 분위기다. "민주주의와 유색인종의 승리"라는 환호가 쏟아졌다. 앨라배마주가 흑인 참정권 운동의 발원지인 만큼, 상징적 의미도 크다. 앨라배마주는 1955년 흑백 분리에 맞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주도한 '버스 승차 거부 운동', 1965년 투표를 가로막는 주정부에 반발한 흑인들의 행진을 경찰이 무자비하게 진압한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이 벌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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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3월 7일 미국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경찰관들이 참정권 시위를 하는 흑인들을 곤봉 등으로 진압하고 있다. 셀마=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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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지지 기반 가진 민주당에 유리"


앨라배마주는 이로써 내년 대선에 앞서 새로운 선거구 지도를 그려야만 하게 됐다. 선거구 조정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인 루이지애나·조지아·텍사스·노스캐롤라이나주 등 남부의 다른 주들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흑인 유권자가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루이지애나주의 존 벨 에드워즈 주지사는 대법원 판결 직후 "투표권법 원칙에 따라 루이지애나는 6개 선거구 중 한 곳을 더 흑인 다수 선거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재확인됐다"고 밝혔다. 텍사스주에서도 흑인 다수 선거구가 3곳 더 추가될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흑인 다수 선거구가 늘어나면 민주당의 의회 장악 가능성도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2020년 대선 출구조사 결과, 흑인 유권자의 87%가 조 바이든 대통령을 찍을 정도로 미국 사회는 인종에 따른 투표 성향이 양극화돼 있다. 당장 내년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화당 일각에서 추진되는 투표권 제한 움직임도 동력을 잃게 됐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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