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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톈안먼 대학살 34주기, “국가안전”을 외치는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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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78회>

조선일보

1989년 5월 14일, 톈안먼 광장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를 들고 시위하는 청년들.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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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열망은 인종과 민족의 차이를 초월하며, 자유의 가치는 국경과 문화의 장벽을 넘는다. 1989년 4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톈안먼 광장에서 이른바 “베이징의 봄”을 맞은 중국 인민은 전 세계를 향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외쳤다. 세월은 급물살로 흘러 당시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자유와 민주를 외치던 청년들은 이미 중장년에 접어들었다. 시간이 약처럼 상처를 치료해준다지만,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없는 과거사의 기억은 갈수록 더 날카로운 창끝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찌른다.

국가의 수도에 탱크 부대를 투입하여 평화롭게 시위하는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바로 그 정권이 30년이 지나서도 한 마디 사과도, 해명도 없이 전체주의적 통제력을 과시하며 오로지 정권 보위를 위해 “국가안전”만을 외치고 있다. 우리는 그런 나라에 대해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정치학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권위주의 정권은 결국 무너지지만,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전체주의 정권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써야만 하나?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중국 밖의 친중주의자들은 과연 또 어떤 억지 논리로 중국공산당의 통치 능력을 칭송할까?

묘하게도 자유 진영 국가들의 역사적 과오에는 현미경을 들이대는 자들이 1989년 톈안먼 대학살에 대해선 단 한 마디 비판도 없다. 미국을 비판할 땐 자유, 인권, 민주, 법치 등 보편적 가치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자들이 중국 앞에선 자발적으로 무장을 해제한 채 덮어주고 감싸기에 바쁘다. 자유와 인권은 서구에서 나온 서구적 가치라서 서방 세계를 비판할 때만 유효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1989년 톈안먼 대학살의 실상에 대해서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 실상을 알려주면 과연 그들은 또 어떤 독재 옹호의 궤변을 펼칠까?

1989년 6월 3일 밤 톈안먼 대학살의 시작

34년 전 오늘, 중국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베이징 도심에 진입한 소위 “인민 해방군”은 탱크 부대를 앞세우고 시민과 학생들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1989년 6월 4일 아침, 서울 시내버스 라디오 뉴스에서도 톈안먼 대학살의 총성이 울렸다. 톈안먼 현장인 듯 기자는 국제전화로 그 소식을 알렸다. “여러분은 지금 베이징 시내에서 발포된 총성을 듣고 계십니다.”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탕, 탕, 탕!” 1초 정도 간격을 두고 울리는 날카로운 총성이었다. 벌써 34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그날 등굣길 붐비는 버스 안에서 들었던 총성은 지금도 문득문득 악몽처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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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3일 인민대회당 앞에서 군인들에 둘러싸인 채 저항하는 시민들. 한 여인의 손목을 잡아끄는 군인을 한 시민이 막아서고 있다. /Jeff Widene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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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발포는 1989년 6월 3일 밤 11시쯤 톈안먼 광장에서 서쪽으로 7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무시디(木樨地) 다리 부근에서 발생했다. 그날 저녁 8시부터 노동자, 대학생, 시민들은 두 대의 버스로 길을 막고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향해 곤봉을 휘두르며 최루탄을 쏘아댔다. 10시경 버스에 불어 붙어 가스통이 폭발했다.

밤 11시쯤, 군인들은 군중을 향해 최초의 실탄 사격을 개시했다. 낮게 다리를 향해 발사된 총알은 여러 시위 군중의 다리와 복부에 맞았다. 순식간에 거리엔 매캐한 화약 내음에 뒤섞인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자정을 기해 장갑차가 버스를 들이받았고, 군인들은 시위대를 무차별 난사했다. 주변 건물 12층에서 창밖으로 거리를 내다보던 청소부가 유탄(流彈)을 맞고 즉사했다. 8층 건물 발코니에 있던 한 여인도 총탄을 맞았다.

새벽 다섯시쯤엔 한 사내가 작은 트럭을 몰고 탱크에 부딪히며 폭사했다. 사람들은 달아나는 군인들을 향해 “주구(走狗·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아!”하고 소리쳤다.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했고, 군인들은 기관총을 마구 쏘아댔다. 격해진 시위대는 탱크 위에 올라타며 저항했으나 곧 수백 대의 군용 트럭이 마구 몰려들면서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1989년 6월 5일, 미국 엘에이 타임스(LA Times) 존 팜프렛 (John Pomfret) 기자 보도 요약).

1989년 6월 3일 늦은 밤에서 다음 날 이른 새벽까지 중국의 수도 베이징 톈안먼 광장 부근에서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군인들이 쏘아대는 AK-47의 총탄에 맞아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탱크에 깔려서 압사하거나 회복 불능으로 다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텐안먼 대학살은 중국공산당의 폭력성과 악마성을 전 세계에 드러내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인민 해방”의 군대가 어떻게 비무장 상태로 평화적 시위를 이어가는 수많은 인민을 전시의 군사 무기로 학살할 수 있는가? 개혁·개방에 나선 지 불과 10년밖에 되지 않는 중국공산당이 과연 왜, 어떻게, 무엇을 바라고 그런 무참한 대학살을 자행해야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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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3일 베이징 도심에 투입된 군부대가 학살을 감행하기 직전, 탱크 위에 올라서 시위하는 청년들. /Jeff Widene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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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몇 명이나 죽고, 몇 명이나 다쳤나?

1989년 6월 6일, 국무원 대변인 위안무(袁木, 1927~2018)는 기자회견에서 군대 사상자가 5000명, 군중 사상자 2000명이며, 총사망자는 300명을 넘지 않고, 학생 사망자는 불과 23명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현장 기자들은 그 발표를 믿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은 “괴벨스네, 괴벨스야!”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6월 30일 베이징 시장 천시통(陳希同, 1930~2013)은 학생 36명을 포함한 200여 명이 사망하고 3000여 명의 “비(非)군인”이 상해를 입었고, 경찰과 군인 부상자는 6000명 이상이라 발표했다. 그때부터 중국 정부는 시위대가 먼저 군인들에게 폭행을 가했고, 수세에 몰린 군인들의 발포는 정당방위였고, 그 결과 군경의 사상자가 민간인 사상자보다 많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중국 정부의 통계수치는 전혀 미덥지 못하다. 요즘도 중국 정부의 발표는 국제적 공신력이 없다. 1989년 톈안먼 광장의 사상자에 관한 중국 측 통계는 절대로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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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5일 베이징 시내에 집결한 탱크 부대의 모습. /Jeff Widene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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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아침 중국 적십자가 외국 기자단에 발표한 사망자의 수는 2600여 명에 달한다. 베이징의 병원들을 직접 돌며 사망자를 확인한 스위스 대사는 사망자 수를 2700명이라 증언했다. 소련 기자들은 그 수치를 1만명 정도로 파악했다.

캐나다의 저명한 역사학자 티모시 브루크(Timothy Brook)가 1990년대 초 현장답사, 목격자 증언, 병원 기록 등을 조사해서 추산한 사상자의 규모는 사망자가 최소 2800여 명, 부상자가 최소 7400여 명이었다. 2017년 10월 기밀 해제된 주중 영국대사 앨런 도널드(Alan Donald)의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1989년 베이징의 민간인 희생자가 최소 1만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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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0일 보도된 도널드 주중 영국대사의 극비 보고서. 홍콩 언론 “홍콩(香港) 01” 기자가 영국의 기록보관소에서 이 문서를 찾아내서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hk0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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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톈안먼 대학살의 인명 피해에 관해 지금껏 나온 추측을 보면 최소 300여 명에서 최대 1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중에서 남겨진 병원 기록으로 추산해 봐도 일단 사망자가 3000명이 넘는다고 봐야 타당할 듯하다.

문제는 그 역시 정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당시 상황에서 베이징의 실제 사상자 중에서 통계에 잡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처벌이 무서워서 유가족이 몰래 시신을 지방으로 옮겨가서 화장하는 사례도 적잖았고, 정부의 만행을 폭로하기 위해 희생자의 장례를 늦추는 사례도 있었다. 부상자의 경우 수술이나 응급치료가 필요하지 않으면 상처를 입은 채로 숨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병원 기록 자체가 부정확했을 수 있다. 의료진은 경찰에 체포되지 않게 부상자의 신원을 숨겨주려 했으며, 또 정부의 요구에 따라 X-레이 등 의료 정보를 파괴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아울러 위에 제시된 수치들은 모두 사상자를 베이징에 한정하고 있다는 점 역시 큰 문제다. 1989년 민주화 운동의 중심은 베이징의 톈안먼이었지만, 당시 지방의 대도시에서도 베이징과 연동되어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났다. 일례로 쓰촨성 청두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잇따랐다. 베이징과는 며칠 시차를 두고 전개됐던 청두(成都)의 시위는 6월 4일 톈안먼 대학살의 소식이 전해지자 거세게 들불처럼 타올랐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터져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중국 정부에 따르면, 당시 청두에서는 8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미국 외교관들은 10명에서 30명까지라 말하며,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수십 명에서 100명에 달한다. 그 현장에 있었던 미국 미시간대학 인류학자 칼 허터러(Karl Hutterer)는 1989년 6월 23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청두 나름의 톈안먼 학살”이라는 투고문에서 비무장한 시위 군중에 대한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 과정을 고발하고, 300명에서 400명이 곤봉과 칼에 맞아 죽었다고 증언했다. 1989년 6월에 벌어진 “청두 나름의 톈안먼 학살”은 1989년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선 수도에 국한된 협소한 시각을 넘어서는 대륙적 시각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망각인민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Amnesia)’의 저자 루이자 림(Louisa Lim)의 탄식처럼 “중국만큼 큰 나라에서 이 말고도 잊힌 희생자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국가안전”을 내걸고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중국공산당

최근 시진핑 정부는 “국가안전”을 더욱 강조하며 감시와 통제의 고삐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지난 5월 30일 시진핑 총서기는 국가안전 회의에서 특히 “정치 안전”의 보위 강화와 인터넷 정보망 및 인공지능의 체계적 통제를 구체적으로 주문했다. 5월 31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면에 그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시진핑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는 중앙국가안전위원회의 주석직도 겸하고 있다. 중국의 중앙국가안전위원회를 한국의 산업안전공단쯤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중국의 독특한 정치적 맥락에서 “국가안전”의 의미는 전국 전역 전 분야를 망라하는 총체적 안보 및 치안 유지와 직결된다. 그 구체적 내용을 보면, “정치 안전”, “국토 안전”, “군사 안전”, “경제 안전”, “문화 안전”, “사회 안전”, “인터넷 안전”, “과학기술 안전”, “생태 안전”, “자원 안전”, “핵 안전” 등 전국 전역 전 분야를 망라한다.

2015년 국가안전법이 통과된 이래 시진핑 정권은 매해 4월 15일을 “국가안전 교육일”로 선포하고 전 인민에 대한 “안전 교육”을 강화해오고 있다. 국가안전법의 명시적 목적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안전을 유지하고, 인민민주독재의 정권과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보위하고, 인민의 근본 권익을 보호하는” 데에 있다. 결국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유지 및 강화를 위해 전국 전 분야에서 정권을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개인, 집단, 세력은 한 치의 예외도 없이 감시하고 탄압하겠다는 공공연한 선언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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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 새벽 탱크 부대가 지나가는 베이징 시내 시창안(西長安)가 류부커우(六部口)에 널브러져 있는 희생자 시신들. /1989년 6월 19일 타임(Time)지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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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정권으로선 정부 비판에 대해 중국의 “정치 안전”을 해친다는 죄목을 걸어 금지할 수 있으며, 문화·예술계와 지식계의 자유로운 창작 및 비평 활동은 중국의 “문화 안전”을 해친다는 명분으로 억압할 수가 있다. 국가안전이 결국은 독재 강화 및 전일적 사회 통제의 법적·정치적 명분으로 작용한다.

상식적으로 정부가 도덕 재무장을 부르짖는 사회는 도덕이 무너진 사회이고, 정부가 전면에 나서 “국가안전”을 강조하는 사회는 심각하게 안전하지 못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출산율 저하, 청년 실업률 증가, 고령화 가속에 3년간 지속되었던 제로-코비드 정책의 부작용으로 5%의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내놓은 시진핑 정부는 결국 군경에 의한 감시와 통제로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다.

톈안먼 대학살은 34년 전의 과거가 되었지만, 자유와 인권과 민주의 측면에서 중국공산당은 조금도 진화하지 않았다. 34년 전 “국가안전”을 내걸고 평화롭게 시위하는 인민을 짓밟은 바로 그 정권이 지금도 “국가안전”을 외치며 전체주의적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중국 인민이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작금의 상황에선 중국 밖의 세계시민이 힘을 합쳐서 중국 정부를 규탄하고, 비판하고, 압박해서 견인하는 방법밖엔 달리 묘수가 없을 듯하다. <계속>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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