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아픔 전세계 전한 ‘꼬마 상주’
전영진, “엄마,조국이 나를 불러요”
2019년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 39주년 기념식이 열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 총에 맞아 숨진 조사천 씨(당시 34세)의 묘를 찾아 참배했다. 사진은 아들 조천호 씨(당시 5세)가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모습[5·18기념재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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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광주)=황성철 기자]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헌정 유린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승소했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광주지법 제14민사부(재판장 나경 부장판사)는 5·18 국가폭력 피해자 20명(상속인 포함)이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청구한 금액의 41.3-89.3%를 인정했다.
원고들은 판결이 최종 확정되면 최소 810만 원에서 최대 1억 원에 이르는 정신적 피해 배상금(위자료)을 받게 된다.
이번 소송에는 정춘식·전계량 전 5·18유족회장과 가족, 차종수 5·18기념재단 기록진실부장과 가족, 조사천·박금희 열사의 유족 등이 함께했다.
1980년 34세였던 조사천 열사는 전세계에 5·18 아픔을 전한 ‘꼬마 상주’ 사진의 영정 주인공이다.
조 열사는 같은 해 5월 20일 광주교대 주변에서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보고 항쟁에 참여했다.
이튿 날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쏜 총을 맞고 숨졌다.
조 열사가 3대 독자였던 탓에 다섯 살 난 아들 천호군이 상주를 맡았다.
아버지의 영정 위에 턱을 괸 사진이 외신에 보도되면서 5·18을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가 됐다.
전계량 전 5·18유족회장의 아들인 전영진 열사도 고교 3학년 때 휴교령이 내려지자 참고서를 사러 가던 중 계엄군에게 잡혀 폭행당했다.
그는 군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항쟁에 참여했다가 조준 사격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그가 집을 나서기 이틀 전 어머니에게 “엄마, 조국이 나를 불러요”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정춘식 전 5·18유족회장의 동생인 정윤식 열사는 1980년 5월 27일까지 최후 항쟁에 참여했다가 상무대로 연행됐다.
102일간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23살인 1982년 2월 28일 숨졌다.
차종수 5·18재단 부장의 형인 차종성 열사도 1980년 5월 19일 무등경기장 주변에서 계엄군에게 마구 구타당한 뒤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모진 고문 끝에 석방됐으나 후유증으로 3년 뒤 숨졌다.
박금희 열사도 고3 때인 1980년 5월 21일 투쟁하는 시민들을 위해 헌혈한 뒤 귀가하던 중 계엄군 총탄에 희생됐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신군부의 헌정 질서 파괴 범죄에 대항한 정당행위를 했는데도 불법 체포·구금·고문을 당해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이 인정된다”며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된 반인권적 행위라는 이 사건 불법 행위의 중대성, 인권 침해 행위 재발 방지 필요성, 피해자와 유족의 고통, 43년간 배상이 지연된 점 등을 두루 고려해 각각 위자료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hw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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