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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바삭거리는 살얼음 속 팥의 순박한 단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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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팥빙수

외식을 하면 어머니는 쉽게 만족하지 못했다. “이 돈이면 집에서 몇 번은 먹을 수 있겠다”라며 비싼 값에 불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말만 하지 않았다. 카스텔라 굽는 틀을 사서 몇 번이고 구웠다. 어머니는 “이건 어떠니?”라고 매번 물었다. 대답은 늘 신중했다. 만약 ‘별로다’라는 식으로 답을 했다간 기계가 아예 없어질지도 몰랐다.

여름이 되자 어머니는 빙수 기계를 집에 들였다. 연유, 빙수떡, 젤리, 팥 통조림도 냉장고와 찬장에 들어찼다. 학교를 마치면 나와 동생은 부산 영도의 산복도로 비탈길을 넘고 넘어 집으로 달려갔다. 빙수 기계 돌리는 것은 어머니 몫이었다. 돈 세는 듯한 ‘탁탁탁’ 소리가 들리면 대접 가득히 하얀 얼음 가루가 쌓였다. 나와 동생은 그 얼음 위에 탑처럼 고명을 올렸다. 동생은 연유, 나는 우유, 동생은 떡, 나는 젤리였다. 어머니와 우리 형제는 팥빙수를 나눠 먹으며 맛을 평가했다. 그릇 바닥이 보이면 머리가 띵하고 몸에 한기가 돌았다.

조선일보

경기 성남시 수정구에 있는 지선당의 팥빙수와 떡구이.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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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덕분에 본격적으로 팥빙수를 사 먹기 시작한 것은 나이가 한참 든 후였다. 그동안 팥빙수는 몇 번의 유행을 탔다. 눈꽃빙수라고 하여 우유 얼음 분말을 곱게 갈아 쓰기도 했고 떡과 같은 토핑을 잔뜩 올리기도 했다. 유행가 듣듯이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예전 먹던 맛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2010년 처음 문을 연 ‘강정이 넘치는 집‘은 그리 길지 않은 역사에도 한식 디저트로 단단히 자리를 잡은 집이다. 청담역 근처, 나무로 바른 외벽과 커다랗게 올린 간판, 문 사이로 보이는 너른 주방과 그 앞에 쌓아올린 강정과 떡들을 보고 쉽게 발길을 돌릴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들어가니 요즘 보기 힘든 좌식 좌석이 안방처럼 넓게 마련되어 있었다.

호두를 달달하게 코팅한 ‘호두정과’는 달지만 거북스럽지 않은 얇은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퍼핑콩을 견과류에 함께 버무려 굳힌 ‘오란다’도 물엿에 푹 적셔 낸 맛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견과류의 고소한 맛이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단맛이 받치는 모양새였다. 유기 그릇에 소박하게 쌓아낸 팥빙수는 흔한 우유 얼음이 아니었다. 투명한 물 얼음을 거칠게 갈아내 밑에 쌓고 그 위에 팥소와 인절미, 절이고 말린 대추를 정갈하게 올렸다. 꾸밈이 많고 화려한 맛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팥의 맛을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얼음과 다른 고명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한입 먹었을 때는 맛에 빈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먹을수록 그 맛의 빈자리가 조금씩 채워져갔다. 마치 붓을 여러 번 옮겨 칠한 수묵화처럼 그 맛이 조금씩 조금씩 겹치고 쌓여 큰 그림을 이뤘다.

팥빙수를 찾아 다시 가야 할 곳은 강남보다 더 남쪽에 있는 위례 신도시다. 아파트 단지 수만큼이나 카페가 많은 이곳에서 여름이면 사람이 몰리는 곳의 이름은 ‘지선당’이다. 가게는 작았고 다락방 같은 2층이 있었다. 2층 계단은 좁고 가팔라 음식을 들고 나르는 대신 작은 도르래로 음식을 실어 위로 올려줬다. 신경 쓰고 보지 않는다면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를, 그만큼 작은 집이었다. 이웃집 손님을 본 것처럼 모든 이를 반갑게 맞는 직원의 인사를 뒤로하고 2층에 올라가니 사랑방처럼 아담한 공간에 좌식 좌석이 있었다.

팥빙수는 우유, 두유, 우유녹차 등 얼음 종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유리 대접에 소복이 담겨 나온 팥빙수는 꾸밈이 적었지만 볼수록 정감 가는 옛 친구 같았다. 한입 떠먹자 친숙하지만 범상치 않은 맛이 났다. 그저 사서 쓰겠거니 했던 떡과 연유 모두 아는 맛이 아니었다. 물으니 이 집은 단팥, 연유, 떡 등 모든 재료를 직접 만든다고 했다. 한 숟가락 먹으면 뭉근히 익혀낸 팥의 순박한 단맛이 밀물처럼 천천히 밀려들어 숟가락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바로 철판에 구워낸 떡은 한입 깨물자마자 눈이 크게 뜨였다. 겉은 살얼음을 깨듯 섬세하게 바삭거렸다. 속은 애기 볼살처럼 부드럽고 또 탄력 있었다 .무엇보다 직접 만든 조청은 물처럼 옅은 농도였는데 갈증 끝에 마신 이슬물처럼 맑게 달았다.

시대가 좋아져 공장에서 만든 음식도 꽤 먹을 만하다. 직접 만드는 게 오히려 비싸다는 합리적인 이유를 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미련스럽게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어릴 적 좁은 집에서 어머니와 복작복작 해먹던 것들의 맛은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최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평생 우리에게 그토록 최선이었다. 아마 그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강정이넘치는집: 인절미 빙수 (소) 1만2000원, 오란다 수제강정 5000원, 호두정과 1만2000원, 0507-1417-0447.

# 지선당: 팥빙수 9000원, 구운 떡 4500원, 0507-1468-5562.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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