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당시 육군 보병학교 교도대에서 근무한 정광효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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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경남 합천군의 한 지역신문사 사무실에서 만난 정광효(65)씨는 오래된 일기장 안에 보관해온 ‘국난극복기장’ 휘장을 보여줬다. 전두환 정권이 비상계엄(1979년 10월26일~1981년 1월24일)을 해제한 뒤 군인과 공무원 등 79만명에게 수여한 것 중 하나다.
정씨는 “5·18 때 민간인들이 군인한테 당한 것을 아는데 그걸 기념하겠다고 기장을 주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정씨는 일기에 ‘훗날 전씨 시대가 끝날 때 이 쇳조각이 올가미의 상징일지 모르겠지만 주는 거니까 받긴 했다’는 속마음을 적어놓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 복무를 했던 정광효씨가 1981년 전두환 정권에서 받은 국난극복기장과 이에 대한 생각을 쓴 일기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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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의 고향이기도 한 합천 율곡면 출신인 정씨는 1979년 6월29일 논산훈련소로 입대한 뒤 전북 익산 제2하사관학교로 파견되면서 호남 땅을 처음 밟았다고 한다. 1979년 12월31일 광주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육군보병학교 교도대(교육·훈련이 주목적인 부대) 조교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5월19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르는 채 소총(M16)과 개인용 실탄 120발, 분대용 실탄 1060발, 비상식량, 판초우의, 모포, 야전삽 등을 챙겼다. 당시 그는 ‘북한군이 쳐들어온 줄 알았다’고 한다.
교도대는 광주와 화순, 나주 사이 경계지역에 투입됐다. 5월24일은 송암동 인근 야산에 매복했다. 시민군이 장갑차를 탈취했다는 소식에 화기중대는 90㎜ 무반동총을 챙겨 광주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1~3중대는 나주 쪽에서 오는 차량을 차단했다.
1979~1981년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에서 근무한 정광효씨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심정을 쓴 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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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씨는 본부~대대~중대가 연결된 무전기를 메고 있었다. 오후 2시께 화기중대장이 “첨병(감시병)들이 마을을 향해 총을 쏘며 우리 쪽으로 접근하는 무장세력을 봤다”고 보고했다. 교도대장(중령)은 “폭도인지 단단히 살펴보라”고 수차례 지시했다. 화기중대장이 “폭도 같다. 우리 앞까지 왔다”고 보고하자 교도대장은 “그러면 잡아라”라고 명령했다.
화기중대는 곧장 무반동총 등으로 장갑차와 뒤따르던 군트럭을 공격했다. 정씨 기억으로는 30여분쯤 교전한 뒤 사격 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상대편이 11공수여단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교전 현장은 참혹했다. 11공수여단의 한 중사가 교도대장의 정강이를 발로 차며 “아군 적군 구분도 못 하는 너희가 군인이냐”고 하극상을 벌였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상황이 정리된 뒤 정씨가 길 안내를 하려고 앞장서서 걷고 있는데 승용차에 탄 최웅 11공수여단장이 옆으로 다가와 권총을 겨누며 “총성이 또 들리면 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후 교도대는 매복 임무를 이어가다 부대로 복귀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산하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에서 근무한 정광효씨가 일기장에 그린 전교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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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는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내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1988년 국회에서 광주청문회가 열리자 합천 출신 김광일 통일민주당 의원실에 전화를 걸어 일기 내용을 토대로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줬다. 명령이었지만 출동한 사실 자체가 미안해 1990년대엔 자녀들을 데리고 국립5·18민주묘지를 네차례나 찾아 희생자들에게 사죄했다고 한다. 전두환씨가 합천 출신이라는 사실도 부끄러움을 더했다. 2004년 합천읍에 생긴 ‘새천년 생명의 숲’이 2007년 1월 전두환의 아호를 딴 일해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자 원래 이름 찾기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글·사진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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