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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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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파우스트’, 원작을 완벽히 재현한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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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악마 메피스토 역을 맡은 배우 박해수가 1막 도입부인 ‘천상의 서곡’ 장면에서 신과 내기를 하고 있다. LG아트센터, 샘컴퍼니, ARTE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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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메피스토는 다섯 손가락을 미끄러지듯 오므렸다 펴고 혀를 날름거렸다. 턱 끝을 휘휘 젓던 그는 “인간들이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고통을 주는지가 내 관심사”라며 기괴한 웃음으로 낄낄거렸다. 4일 공연된 연극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 역을 맡은 배우 박해수(42)는 살아있는 뱀과 같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수리남’ 등을 통해 대세배우로 거듭난 박해수는 이번 작품에서 음흉하고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독일 문호 괴테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 연극 ‘파우스트’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 무대에 올랐다. 평생을 학문에 바친 지식인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벌어지는 ‘비극 제1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모두가 자신을 현자라고 불러줌에도 인생에 회의를 느낀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힘을 빌려 인생의 쾌락을 맛보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영혼을 상실하면서 괴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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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파우스트(왼쪽·유인촌)가 메피스토(박해수)의 꾐에 내적 갈등을 겪고 있다.  파우스트는 “이 세상의 모든 근원을 알 수만 있다면…”이라며 인생에 무력감을 느낀다. LG아트센터, 샘컴퍼니, ARTE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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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과 브라운관, 무대를 넘나들며 연기력을 입증한 박해수는 ‘악’의 무게감과 경박함을 시계추처럼 매끄럽게 오가며 광기를 피부로 느끼게 했다. 2007년 연극 ‘최강 코미디 미스터로비’로 데뷔한 뒤 연극계 간판 배우로 활약했던 박해수가 연극 무대로 돌아온 건 ‘2018 이타주의자’ 이후 5년 만이다. 연극 ‘프랑켄슈타인(2014)’에서 분노와 모멸감이 치미는 괴물을 연기했다면 ‘파우스트’에선 비열하고 무자비한 괴물로 변신했다. 첫 등장부터 방대한 대사가 빠른 속도로 치고 나왔지만 또렷한 발성과 발음으로 막힘없이 소화해냈다.

노년의 파우스트 역은 배우 유인촌(72)이 맡아 악마와 호흡을 맞췄다. 데뷔 51년차 베테랑 배우인 만큼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적 감정을 풍부하게 담아냈다. 그는 “쾌락과 욕정, 선조들의 지식” 중 무엇도 끝내 손에 쥐지 못한 파우스트가 느꼈을 무력감을 대사 한줄 한줄에 응축시켜 카리스마 있게 표현해냈다. 메피스토를 만났을 때의 환희와 두려움은 찰나에 교차하는 눈빛으로 담아냈다. 젊어지는 묘약을 먹고 청년이 된 2막의 파우스트는 드라마 ‘펜트하우스’에서 로건 리 역으로 입지를 다진 배우 박은석(39)이 연기했다.

풍성한 볼거리로 고전극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춘 공연은 원작을 향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연출은 연극 ‘코리올라누스’ ‘페르 귄트’ 등 고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내온 양정웅이 맡았다. 원전 해석에 무게를 둔 양 연출은 공연 시간 165분에 걸쳐 파우스트 내면 갈등의 기틀을 견고히 쌓아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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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파우스트(왼쪽·박은석)가 메피스토와 타락의 절정에 다다른 장면. LG아트센터, 샘컴퍼니, ARTE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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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특유의 딱딱함을 완벽히 벗어던지진 못했지만 변화무쌍한 무대 연출로 관객 몰입도를 높였다.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패널로 투사되는 무대 배경은 극 초반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천상에서 파우스트의 신비로운 서재로, 해골 가득한 마녀의 부엌으로 옮겨가며 초현실적인 감각을 선사했다. 타락과 혼돈이 절정에 달하는 장면에선 새빨간 조명을 수직과 수평, 사선으로 길게 쏘고 천장에 달린 12개의 팬(fan)을 가동해 아수라장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파우스트가 탐욕에 휩싸일 땐 정령 역 배우들이 그 주위에서 기괴한 춤을 추며 눈길을 모았다.

배우들이 프로시니엄에 갇혀있지 않고 무대를 넓게 사용한 것도 극에 명랑함과 입체감을 더했다. 일부 장면에선 배우들이 객석 통로에 깜짝 등장하며 관객 주의를 재차 환기시켰다. LED 패널로 송출되는 실시간 백스테이지 연기는 ‘파우스트’의 파격적인 볼거리다. 파우스트가 사랑하는 여자 그레첸의 방에 메피스토와 숨어들어 보석함을 넣어놓는 영상은 실제 배우들이 무대 뒤 마련된 세트장에서 라이브로 연기하는 모습을 동시 송출한 것이다.

4월29일까지, 4만4000∼9만9000원.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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