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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세계에 없을 K-정치 ‘위장 탈당’ [만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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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처칠 총리는 당적을 수차례 옮겼다. 보수당의 보호관세 정책에 반대해 탈당한 뒤 자유당으로 갔다. 보수당의 비판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과격한 노동운동으로 국가 위기가 고조되자 보수당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철새라는 비판은 듣지 않았다. 공천이나 자기 이익이 아닌 정책과 노선 문제였기 때문이다.

▶김대중·김종필 공동 정권 때 ‘의원 꿔주기’라는 신종 탈당이 등장했다. 자민련이 총선에서 17석밖에 못 얻자 원내 교섭단체를 만들어 주느라 민주당은 의원 4명을 탈당시켜 자민련으로 보냈다. 유럽식 연정을 표방했지만 세계 어디에도 없던 편법이었다. 이 의원들은 ‘연어처럼 돌아오겠다’는 유행어도 만들었다.

조선일보

▶2012년 통합진보당 탈당파는 비례대표 의원들을 데리고 나가려고 ‘셀프 제명’을 했다. 제명하면 비례대표도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바른미래당 분당 때도 탈당파가 비례대표 9명을 셀프 제명했다. 2020년 총선 때 민주당이 강제 도입한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한국에선 ‘비례 위성 정당’을 만들었다. 여야는 자기들 위성 정당이 앞 순위 기호를 받도록 하려고 의원 꿔주기와 셀프 제명을 했다.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되듯 독일식 선거제가 한국 정치에 오자 편법이 난무하는 엉망진창이 됐다.

▶민주당은 ‘검수완박’ 법안을 처리하려고 자기 당 의원을 위장 탈당시켜 무소속으로 만들었다. 무소속 의원을 안건조정위에 넣으면 논의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다. 한국 정치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꼼수였다. 민주당은 그 후 각종 투기·비리 혐의로 제명되거나 위장 탈당한 의원들을 아예 입법 폭주 도우미로 활용하고 있다. 위장 탈당한 의원은 그 행위를 마치 자랑처럼 여기고 있다. 공수처법을 밀어붙일 때는 반대하는 의원을 상임위에서 일방적으로 빼고 다른 의원을 집어넣기도 했다. ‘사·보임’ 꼼수였다.

▶과거 과테말라 대통령이 아내를 대선에 출마시키려고 위장 이혼한 적이 있다. 직계가족은 출마를 금지한 헌법 규정을 피하려 한 것이다. 러시아 메드베데프는 푸틴을 위해 대통령 자리를 잠시 맡아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나라는 대부분 민주국가가 아니다. 민주국가에서 한국처럼 민주주의를 비웃는 각종 편법 아이디어가 난무하는 곳은 없다. 세상의 모든 좋은 제도는 한국에 오면 변질하고는 한다. 그 나라에서 그 제도를 만들 때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허점을 한국 정치가 찌르기 때문이다. 가히 ‘K정치’라 할 만하다.

[배성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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