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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48년 만의 반전… 세계 최장 수감 日사형수, 87세에 무죄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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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법원의 2번째 재심 결정에 검찰 항고 포기로 무죄 확정

조선일보

누나와 함께 - 일가족 4명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48년간 사형수로 복역한 전 프로 복서 하카마타 이와오(왼쪽)씨가 지난 20일 자택에서 TV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오른쪽은 누나 히데코씨.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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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서른 살 프로 복서 하카마타 이와오는 ‘꺾인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시즈오카현 복싱 유망주였던 그는 23세에 프로 데뷔, 29전 16승 10패 3무의 경기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최고 랭킹은 전(全)일본 페더급 6위. 데뷔 이듬해인 1960년에는 19경기를 치를 정도로 악착같이 매달렸다. 아직도 일본에서 깨지지 않는 한 해 최다 출전 기록이다. 하카마타는 복싱 선수로 재기하는 꿈을 가슴에 품고 시즈오카로 귀향해 된장 공장에 취직했다.

1966년 6월 30일 새벽, 된장 공장 전무의 집에서 누군가 일가족 4명을 살해하고, 불을 지른 사건이 발생했다. 두 달 뒤 하카마타는 용의자로 체포됐다. 검찰은 재판부에 그가 쓴 자백서 45통을 제출했다. 하카마타씨는 “강압적인 신문에 허위 자백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1980년 12월 12일, 우리나라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일본 최고재판소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선 동생을 위해 누나 히데코가 법원에 매달렸다. 갖은 수단을 동원해 “내 동생은 무죄다. 재심해 달라”고 호소했다. 꿈쩍도 하지 않던 여론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카마타를 구하는 모임’이 만들어졌고, 1992년에는 ‘주(主)여, 언제까지입니까. 무죄의 사형수, 하카마타의 옥중 서신’이라는 책도 나왔다. 2010년엔 그의 사연이 영화로 제작돼 상영됐다.

2014년 반전이 일어났다. 재심 청구 소송을 맡은 시즈오카 지방법원의 판결이 분수령이 됐다. 사형 판결의 핵심 증거였던 ‘범인의 옷’에서 나온 혈액을 분석한 결과, 하카마타의 혈액 샘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과학 증거가 새롭게 나온 것이다. 시즈오카 지방법원은 재심 명령과 함께 구금과 사형 집행 중지 결정을 내렸다. 48년을 복역한 전(前) 프로 복서는 78세 노인이 돼 석방됐다.

일본 검찰은 재심 판결에 불복, 도쿄고법에 즉시 항고했다. 2018년 도쿄고법은 ‘재심 인정 불가’ 판결을 내렸다. 이에 변호인이 특별항고했고, 2020년 최고재판소는 파기환송 결정을 내리며 사건을 도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지난 20일 도쿄고법에서 ‘재심 개시’ 판결이 나왔다. 아사히신문은 21일 “일본 검찰은 이번 재심 개시 판결에 대해 특별항고를 하지 않기로 했다”며 “시즈오카 지방법원에서 하카마타 사건을 조만간 재심할 예정이며, 사실상 무죄가 확정적인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검찰 측은 “승복하기 어려운 점이 있긴 하지만, 특별항고를 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승복하기 어려운 대목이란 ‘수사기관의 날조(捏造)’ 의혹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됐다. 하카마타씨가 무죄라면 그를 사형수로 만든 핵심 증거인 ‘범인의 옷’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것이다. 과거 재판 과정에서 검찰은 범행 현장 근처의 된장 탱크에서 발견된 ‘5점의 피 묻은 의류’를 하카마타가 범행 당시 입었던 옷이라며 증거로 제시했다. 수사 기관이 범죄 발생 직후 공장을 샅샅이 뒤졌을 때는 발견되지 않았고, 1년 2개월 뒤 된장 탱크에 있는 걸 공장 직원이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초동 수사를 맡은 형사는 “사건 직후 탱크 내부도 수사했는데 (중요한 증거를) 빠뜨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증언했다.

하카마타의 자백서에는 범행 당시 복장에 대해 ‘잠들 때 복장인 파자마에다 점퍼였다’고 적혀 있는데, ‘의류 5점’에 파자마와 점퍼는 없다. 도쿄고법은 재심 판결문에서 사형 판결의 결정적 증거인 ‘의류 5점’에 대해 “하카마타가 범행 당시 입고 있었다는 데 대해 합리적인 의심이 생긴다”며 “제삼자가 숨겼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고, 수사기관이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수사기관이 하카마타의 유죄 증거로 삼기 위해 사건 이후 된장 탱크에 피 묻은 의류를 숨겨 놨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증거 조작 의혹이 불거지며 시민들의 신뢰가 높은 검찰과 경찰의 명예가 바닥까지 떨어지는 상황이다.

누나 히데코씨는 “세상이 이렇게 기쁜 일이 없다”며 “동생에게 ‘네가 말한 대로 됐어. 이제 안심해도 돼’라고 말했다”고 NHK에 전했다. 48년을 복역해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수감된 사형수’라는 기네스 기록(2013년 등재)을 갖고 있는 하카마타는 특별한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된 왕년의 프로복서는 젊은 시절의 꿈을 절반쯤 이뤘다. 지난 2014년 석방 당시 세계복싱평의회(WBC)가 하카마타에게 명예 챔피언 벨트를 수여한 것이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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