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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일사일언] 호른과 마부작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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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호른과 마부작침/일러스트=한상엽


나의 연구실 벽에는 지칠 때 마음을 다잡기 위한 여러 인쇄물이 붙어 있다. 그중 항상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작년 11월에 있었던 호른 연주자 펠릭스 클리저(Felix Klieser)의 리사이틀 팸플릿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양팔이 없었지만, 다섯 살 때 호른 소리에 매료되어 왼발과 입술을 이용해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떤 관악기보다 풍부한 음색을 내는 호른은 오케스트라 화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만, 깨끗하고 정확한 음을 내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 악기를 배우는 것은 지름길과는 거리가 멀다. 잘된다 싶다가도, 며칠만 연습을 놓으면 다시 형편없는 소리를 내게 된다. 연습 과정은 일견 지루할 것 같지만, 한 음씩 호흡에 몰입하며 소리를 만들다 보면 나를 잊는 황홀경에 빠질 수 있다. 같은 호른 연주자로서 이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안다.

신체적 제약을 이기고 홀을 가득 채우는 펠릭스 클리저의 아름다운 소리는 25년간 있었던 꾸준한 몰입의 과정을 방증한다. 연습과 연주를 즐기며 매 순간에서 희열을 얻는 그는 남들이 5~10년을 보고 미래를 계획할 때, 스스로는 30년을 바라본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팸플릿의 바로 옆에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글자를 붙여 놓았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멈추지 않고 정진하면 언젠가는 성공함을 이르는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과정들의 최종 결과를 한 가지 숫자로 환산하고, 또 이를 서로 비교하려는 경향이 있다. 매출, 수익, 건수, 성적 등 온갖 지표들이 만들어진다. 지표들은 다시 이러저러한 변환을 거쳐 ‘돈’이라는 척도로 다시 줄 세워진다. 이런 가치관은 공기처럼 평소엔 느낄 수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한다. 최소한의 투입으로 최대한의 산출을 만들어 내며, 그 속도를 매년 더 빠르게 하는 것이 ‘성장’으로 정의되며, 사회는 성장을 위한 지름길만을 찾는다. 그 과정 속에서 배우고 고민하고 또 즐길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안타깝게도, 많은 연구들에 따르면, 이러한 결과주의적 문화가 구성원들의 만성적 스트레스와 번아웃(Burn out)을 일으킬 수 있음을 시사한다. 진정한 성장과 지속가능한 성취를 원한다면, 조금은 둘러 가더라도 과정을 즐기고 또 몰입해 보는 것은 어떨까.

조선일보

정희원 교수.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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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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