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의료진 헌신만 미화하지 말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권역외상센터 10년

한겨레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왼쪽 세 번째)이 지난 1월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 어린이병원 회의실에서 필수의료 지원대책 현장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왜냐면] 문윤수 | 대전을지대병원 권역외상센터 교수

주 52시간 노동시간 규제를 최대 69시간까지 허용하는 정부의 노동시간 개편방안이 최근 논란이다. 근무일 사이에 11시간 연속 휴식을 포함할 경우 주 80.5시간(7일 근무 가정), 11시간 연속 휴식을 포함하지 않을 땐 최대 64시간 노동이 가능하도록 한 고용노동부의 방안을 놓고 반발 여론이 거세다.

순간 지난주 근무 시간을 헤아려봤다. 주간 근무 3일, 24시간 당직 3일, 그 가운데 일요일 하루는 24시간 당직이었다. 24시간 근무 세 번만으로 노동부가 제시한 69시간이 우습게만 보인다. 현재 근로기준법에 노동시간 한도인 주 52시간을 가뿐하게 넘기는 내 현재 상황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올 뿐이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해 시작한 권역외상센터가 10년이 됐다. 나 또한 그 시작과 발맞춰 중증외상환자들과 동고동락한 지 10년이 돼가고 있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상 근로 시간과 내 근무 시간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 강철, 아니 초인적인 흉부외과 교수님이 있다. 한강 이남 대동맥 환자들에게 최후의 보루가 되는 명의라고 생각한다. 병원 앞 현수막에도 여기저기 언론에서도 ‘○○○ 교수팀 응급 대동맥 환자 수술 114건'이라는 지난해 1년 동안 성과를 알리고 있다. 한두 시간에 끝나는 수술도 아니고 늦은 밤, 새벽에도 촌각을 다투는 대동맥 수술을 3일에 한 번씩 한 셈이다.

대동맥 환자는 수술 뒤에도 오랜 기간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받는다. 외래진료, 정규 수술, 그리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응급 대동맥 환자까지 밤새워 수술하는 흉부외과 교수님은 하루하루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셈이다. 지난주 내 근무 시간은 흉부외과 교수님 앞에서 오히려 초라할 뿐이다.

누군가는 그 교수님을 명의라고 칭송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 교수님의 뼈를 갈아서 환자들 생명을 살리고 있다. 언론에선 ○○○ 교수팀이라고 하지만 실제 그 팀에 흉부외과의사는 그분 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권역외상센터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보건복지부는 ‘몇십 명 인력 확보·지원’이라는 책상 서류로 시작했으나 이제는 이곳 권역외상센터에 나를 포함한 외과 전문의가 단 세 명에 불과하다.

얼마 전 늦은 밤, 뱃속에 장이 터지고 피가 나는 응급환자를 수술하러 급하게 뛰어들어갔다. 당시 흉부외과 수술실에서는 대동맥 수술을 한창 하고 있었다. 다행히 마취과 선생님들이 늦은 밤에도 두 환자의 마취를 굳건히 책임져준 덕분에 나는 중증외상환자를 살릴 수 있었고 대동맥 환자 수술도 잘 마무리됐다. 하지만 수술 뒤 새벽녘에 만난 흉부외과 교수님의 피곤한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필수의료 대책이라고 복지부 등 정부에서 하루가 멀다 하게 발표한다. ‘확충’, ‘해소’, ‘확보 방안'…. 십수 년째 들어본 듯한 단어들이 반복된다. ‘정책 수가 가산’이라는 마시멜로 같은 당근만 제기하는 정책 입안자들께서는 우리 병원 흉부외과 교수님의 일상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종에 있는 복지부 사무실 책상이 아니라 현장의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의문이다.

소수 의료진의 헌신만 미화하고 바라는 것은 대책이 아니라 눈 가리고 아웅밖에 안 된다. 52시간 노동시간 규제를 64시간, 69시간 상향 논의를 보면 이제 헛웃음 밖에 안 나온다. 그렇다고 의대 정원을 더 늘려, 쉽게 말해 낙수효과를 바라보고 대동맥 환자나 중증외상 환자를 치료할 의사를 더 키워보겠다는 얄팍한 대책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무엇을 알고서 하는 말인지 궁금할 뿐이다.

올해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개인 사정으로 인턴 수련과정을 시작하지 않은 후배 의사가 있다. 임시로 미용 시술 의원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돼 한 말이 내 가슴을 찌른다. “이렇게 편하게 돈 벌면서 의사할 수 있다면 절대로 밤새워 수술하거나 환자 보는 것을 못하겠어요.”

지금처럼 ‘환자를 살려보려고 아등바등하는 의사의 헌신’이라는 기사가 앞으로도 가능할지 미지수다. 길게도 아닌 딱 5년만 지나면 ‘촌각을 다투는 중증외상·대동맥 환자를 살릴 의사가 없다’는 기사가 쏟아질 것이 뻔하다.

권역외상센터는 이제 막 10년이 됐다. 예방 가능 사망률이 조금씩 감소하는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고 있으나 아직도 부족한 인력 충원이 최우선 과제다. 미국 의사 연봉 순위에서 흉부·외과 의사는 항상 상위권이다. 미국 의사들은 효율적 인력 배치로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을 갖는다. 그것이 중환자와 중증외상환자의 생존율 향상으로 이어진다. 정부 당국은 이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움트는 봄, 한겨레의 벗이 되어주세요 [후원하기]
▶▶한겨레 네이버 구독! 최신 뉴스를 쏙쏙~▶▶마음 따뜻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뉴스레터 모아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