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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월드리포트] 마크롱의 연금개혁, '피로스의 승리'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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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49조 3항'과 '마르세유의 노래'

지난 16일, 프랑스 하원(**assemblée nationale, '국회'로 번역되지만, 프랑스의 상하원 체계를 감안해 하원으로 지칭)에서 의원들의 합창으로 프랑스 국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과정은 이렇습니다.

이날 프랑스 의회에선 현재 62세인 프랑스인의 정년, 즉 일을 그만두고 국가가 지급하는 연급을 수급하기 시작하는 나이를 오는 2030년까지 64세로 2년 연장하는 내용의 연금개혁법안 표결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전날 상하원 합동위원회가 8시간 넘는 비공개 회의 끝에 관련 법안의 최종안을 마련했고, 오전엔 상원이 찬성 193표, 반대 114표로 이를 가결했습니다. 오후 3시로 예정된 하원 표결만 통과하면 연금개혁 관련 입법이 마무리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정오 무렵 마크롱 대통령은 각료 회의를 긴급 소집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엘리제궁으로 총리와 장관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헌법 제49조 3항'을 발동할지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헌법 제49조 3항'은 긴급한 상황에서 의회 표결을 생략한 채 정부가 입법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조항인데, 하원에서 연금개혁법안이 표결에 부쳐질 경우 부결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전체 577석인 프랑스 하원에서 현재 여당이 250석, 연금개혁에 우호적인 우파 공화당이 61석으로, 두 정당의 의석수를 합치면 과반이 되지만, 프랑스 시민 사회에서 연금개혁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워낙 강하다 보니,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공화당 의원들 여럿이 '반대'에 표를 던질 거란 분석이 나온 겁니다.

엘리제궁에서 회의를 마친 총리가 하원으로 이동하는 동안, 언론을 통해 마크롱 정부가 결국 '헌법 제49조 3항'을 발동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하원에 도착한 총리는 연단에 올라 단호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연금개혁법안은 반드시 통과시켜야 하며, 정부는 '헌법 제49조 3항' 발동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예정된 투표에서) 불확실한 단 몇 표 때문에, 175시간에 걸친 의회 토론의 결과가 무너지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습니다. 상하원이 마련한 합의의 결과가 무용지물이 되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연금제도의 미래를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총리가 연단에 머무는 동안, 정부의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은 '64세, 그건 안 돼'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야유를 퍼붓고, 일부는 연설 도중 자리를 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국가를 부르는 모습이 TV를 통해 프랑스 전역에 생중계됐습니다. 일명 마르세유의 노래(La Marseillaise)로 불리는 프랑스 국가는 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 만들어져, 마르세유 출신 의용병들이 그해 8월 10일 봉기로 파리에 입성할 때 부르며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결국 프랑스의 국가가 됐죠. 가사에는 사람들의 피를 끓게 하는 혁명가 특유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
우리를 치려고, 저 폭군은
피 묻은 깃발을 올렸다
......
그들이 턱밑까지 왔다,
그대 처자식의 목을 베러.

무장하라, 시민들이여!
대오를 정렬하라!
전진, 전진!
저 더러운 피가
우리의 밭고랑을 적시도록.


그날 밤, 파리 시내 콩코흐드 광장엔 정부의 연금개혁법안 강행 처리 방침에 항의하려는 시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퇴근 후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의 수는 어느새 1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이들은 마크롱 대통령을 '폭군' 혹은 '독재자'라 부릅니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연금을 받기 위해 2년 더 일하라"고 말하는 마크롱 대통령을 '처자식의 목을 베러(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으려고) 턱밑까지 쳐들어온 폭군'처럼 묘사하기도 합니다. 시위 현장엔 불길이 치솟고, 마크롱 대통령의 모형은 불길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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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야당들은 정부가 '헌법 제49조 3항'을 발동하겠다고 발표한 이튿날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이르면 다음 주초 표결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현재로선 공화당이 불신임안에 회의적이어서 통과될 가능성이 높지 않지만, 의원들은 어디서나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니 이탈표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의회에도 거리에도 마크롱의 적은 많아졌고, 현지 언론들은 그가 겪어보지 못한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고 평가합니다.

좌파 야당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당'의 다니엘레 오보노 의원은 "마크롱이 '피로스의 승리'(손실이 너무 커 실익이 없는 승전)를 거뒀다"며 정부의 이번 결정으로 "해악은 계속되고 위기는 급속히 악화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임기 때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이미 한 차례 연금개혁을 포기한 적 있는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이 법이 통과되더라도, 그는 '손실이 너무 커 실익이 없는 승전'을 맞게 되는 걸까요? '손실'은 다음 선거에서 여당이 입을 피해를 말하는 걸까요, 프랑스가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을 말하는 걸까요? '실익'은 정치인 마크롱이 취하게 될 이익을 말하는 걸까요, 아니면 프랑스가 얻게 될 이익을 말하는 걸까요? 마크롱이 승리할지, 승리를 한다면 그 승리가 '피로스의 승리'가 될지는 다가오는 프랑스의 역사가 답해줄 겁니다.
곽상은 기자(2bwithu@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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