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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삶이 무너진 그날 새벽 이후…“잠드는 게 무섭다”[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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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나 시내 아파트 붕괴 현장

매캐한 연기 속 여진 공포 계속

경향신문

엄마·아빠는 어디 있을까… 7세 아이가 8일(현지시간) 시리아 이들리브주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이 아이는 50시간 동안의 구조 작업 끝에 건물 잔해 밑에서 구조됐다. 아이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은 모두 숨졌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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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지만 잠에 드는 이는 없었다. 대지진 나흘째인 9일 밤(현지시간), 튀르키예 남부 아다나의 지진 피해 현장에는 눈부신 조명과 심연 같은 어둠이 엇갈렸고, 비통한 침묵과 따뜻한 위로가 교차했다.

아다나 시내 유르트 마을에 있는 아파트 붕괴 현장에선 밤에도 조명을 켜놓고 중장비를 동원한 구조작업이 한창이었다. 가까이 갈수록 입자 굵은 알갱이가 눈알을 긁고, 매캐한 연기가 밀려들었다.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질서 있게 정렬된 아파트들 사이에 쑥 비어 있는 공간은 마치 이 빠진 자리 같아 보였다. 유령도시처럼 불 꺼진 아파트 단지 내에서 구조작업을 위한 조명만이 눈부시게 빛났다.

이 아파트 한 채에서만 20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인근의 또 다른 아파트 붕괴 현장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선 40여명이 실종됐다. 유르트에서는 모두 다섯 채의 아파트가 무너졌고, 인근 귀젤야리의 아파트들도 피해가 컸다고 한다.

다음주 출산을 앞둔 제이란(28)은 아파트 잔해 더미 위로 올라가 콘크리트 더미를 들어올리고 있는 중장비의 움직임을 눈물이 고인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중장비가 잔해 더미 위로 올라가 작업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매몰 현장에서 생존자를 찾을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이란은 “슬퍼서 발을 뗄 수가 없다”며 “우리 집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저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붕괴된 아파트 현장에는 냉장고 자석부터 전자계산기, 캐릭터 상품 등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휘어진 철근 사이로 소파, 매트리스, 대야, 어린아이 공책 같은 것들도 보였다. 무너진 것은 건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었다.

아파트 붕괴 현장 골목을 내려가니 재난관리청(AFAD) 텐트 200여개가 모인 큰 대피소가 나왔다. 원래 마을 장터지만 지진으로 집을 잃거나, 여진의 두려움으로 집에 못 돌아가는 이들의 임시 터전으로 활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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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마련된 임시대피소 튀르키예 강진 나흘째인 9일(현지시간) 아다나의 한 시장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에 피해 지역 주민들이 대피해 있다. 아다나 | 문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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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가에 붙어 앉아 추위를 녹이고 있던 일마드(65)·으센(59) 부부는 지진 이후 필요한 물건 몇 개를 급히 챙기러 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다시는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무너지지 않았던 부분도 안전문제로 철거됐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담요 외에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아내 으센은 집에서 뛰쳐나올 때 급하게 신고 나온,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여전히 구겨 신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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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로 추위 녹이는 주민들 튀르키예 아다나의 아파트 붕괴 현장 인근에서 9일(현지시간) 주민들이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추위를 녹이고 있다. 아다나 | 문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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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무너지지 않은 주민들도 “여진이 올까 두려워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 슈크란(36)은 “너무 무서워서 집에 못 들어가고 있다. 열일곱 살, 열두 살 애들도 무서워한다. 지금은 사원에서 머물고 있다. 다들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학교, 사원, 텐트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제이란 역시 그날 밤 집에서 뛰쳐나온 이후 텐트 생활을 하고 있다. 출산은 다른 도시에서 할까 고민 중이다. 그는 “잘 때마다 무섭다. 아직도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잠들었던 새벽 시간에 지진이 났다는 트라우마 때문에 사람들은 잠드는 것조차 무섭다고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14~15일쯤 다시 큰 지진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펙(31)은 “진짜로 지진이 올까봐 무서워서 집에 못 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단지 내에서 유독 이 아파트만 무너진 것에 대해 “주민들 사이에선 아파트 1층 상가의 기둥을 보기 좋으라고 없앴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들린다”고 전했다.

■음식 나누고 밤새 봉사하고…일상 무너진 이웃들 서로가 버팀목

신발 등 자기 물건 가져다주며
집 잃은 이들 곁에서 힘 보태
내주 ‘큰 지진 온다’ 소문에 불안
병원 주차장은 시신 안치소로

무너진 일상을 지탱해가는 힘은 이웃이었다. 모닥불 사이사이로 음식과 구호물품을 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다. 사람들은 추위를 잊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타주는 커피를 줄 서서 받아갔다. 한 주민이 기자의 손에 케밥을 쥐여주고 떠났다.

슈크란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밥하고 심부름할 일손이 필요하다. 새벽 4시까지 도울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기저귀, 이유식, 약, 음식, 우유, 신발 등등 필요한 것이 많다. 급하게 대피하느라 양말도 못 신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에컨(21)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이곳에 나와 자원봉사를 한다. 그의 누나 에브루(32)는 “방한용품, 의류, 담요 같은 것들이 많이 필요하다”면서 “자기 물건을 가져다주는 이웃들이 많다”고 말했다.

“신이시여, 우리가 무엇을 했길래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우리에게 왜 이런 일들이 생기나요. 이것도 신의 시험인가요?”

시리아 이들리브에서 지진을 맞닥뜨렸던 무하마드 하지 카두르가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했던 질문이다. 튀르키예 대지진 참상을 지켜본 이는 누구나 이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타이주에 있는 하타이트레이닝&리서치 병원 야외 주차장은 시신 안치소로 변했다. 유족들은 주차장을 따라 끝없이 놓인 시신 운반용 가방을 일일이 열어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있다고 NYT가 이날 보도했다. 카라만마라슈에서도 급조된 묘지에 시신들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굴착기들이 숲 외곽을 따라 긴 도랑을 파 사망자 수백명을 안장할 무덤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집을 잃은 이웃을 위해 발 벗고 나서 음식을 나르며 밤새 봉사활동을 하고, 출산을 일주일 앞둔 몸으로도 싸늘한 야간 구조 현장 앞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어릴 적 삼촌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는 하티제(53)는 집을 잃었음에도, 집에서 멀리 떠나온 기자의 안전을 걱정하며 뺨에 축복의 키스를 건넸다.

불 꺼진 아다나에서는 지금 서로가 서로의 신이 돼주고 있다.



아다나 |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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