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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세계와 손잡는 K팝

unni(언니)·noona(누나)...글로벌 K팝 팬덤이 만든 한류어 [헬로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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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의 표기법 ‘돌민정음’을 아시나요

SNS서 그들만의 다양한 표기 탄생

오빠·애교·치맥·볼매 등 소리 나는대로

2021년 26개단어 옥스퍼드영어사전 등재

헤럴드경제

지난 12일 K-팝 보이그룹 ‘세븐틴’ 한글 포스트 및 댓글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팬 운영 트윗 계정 @SVT_Fancafe에 ‘아샷추’의 뜻을 설명하는 글이 올라왔다. [트위터 캡처]


“여러분, 혹시 ‘아샷추’라고 아세요?”

보이그룹 ‘세븐틴’ 멤버 호시가 물었다. 세븐틴의 트위터에서 가장 큰 ‘번역계(번역을 담당하는 팬 계정)’를 운영하는 베트남인 팬 지(Zee)는 순간 당황했다. ‘아샷추’는 처음 들어보는 표현이었다. 지는 “‘샷’에서 대충 감이 왔다”면서 “검색해 보니 ‘아이스 음료에 샷 추가’라는 뜻이더라”며 웃었다.

지는 한국어도, 영어도 모두 모국어가 아니지만 매일 세븐틴을 사랑하는 32만6000여명의 트위터 팔로워를 위해 멤버들이 공식 팬카페와 팬커뮤니티 플랫폼 ‘위버스’에 올리는 메시지와 댓글 등을 영어로 번역해 공유한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최신 유행어나 줄임말 같은, 맥락을 파악해야 하는 표현들. 그는 “(뜻을) 이해한 후 정확히 전달하는 게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K-팝은 지의 사례처럼 해외 팬들이 한국어 공부에 입문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소속사들이 공식 뮤직비디오나 가사, 자체 제작 예능 등의 콘텐츠를 공개할 때 공식 자막을 제공하긴 하지만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콘텐츠, 즉 각종 영상 콘텐츠와 팬카페, 소셜미디어 등은 자동 번역 기능에 의지해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용이 정확하지 않아 애를 먹다 보면 자연스레 한국어 공부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물로 생겨난 것이 바로 지가 활동하는 ‘팬 번역계’다. 팬들은 팬 번역계의 맹활약에 힘입어 아티스트들이 올린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SNS)의 메시지나 영상 등을 이해한다. 이와 함께 아티스트나 기획사가 왜 이 같은 콘텐츠를 올렸는지, 맥락에 대한 해석까지 공유하면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다. 실제로 K-팝의 확산과 함께 한국 문화에 대한 해외 팬들의 관심이 느는 추세다. 한국관광공사가 지난 2020년 해외 K-팝 팬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만2663명 중 약 64%가 K-팝 외에 한글과 한국어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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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세븐틴’의 2018년 서울 콘서트에 참석한 키미 커너(Kimmi Kerner). [본인 제공]


세븐틴의 미국인 팬 키미 커너(24)는 K-팝과 한국 드라마의 매력에 빠져 한국어를 배우러 온 해외 팬 중 하나다. 키미는 지난 2015년 세븐틴을 통해 처음 K-팝을 알게 된 후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어를 배웠지만 한국어에 대한 갈증이 여전했다. 이에 아일랜드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에 건너와 지난해부터 서강대 한국어교육원에 재학 중이다.

키미는 최근 K-팝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증가했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는 “K-팝이 서양에서 주류 음악이 됐다는 지표는 많다”며 “전과 달리 많은 해외 가수들이 K-팝 가수 혹은 그룹과 협업을 활발히 진행하는 점이 그 방증”이라고 말했다.

키미는 수년의 한국어 공부 끝에 드디어 국내에서 생산되는 영상을 자막 없이도 볼 수 있게 됐다. 그는 “내가 만나본 많은 해외 K-팝 팬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거나 이미 배우고 있다”며 “다른 나라의 문화를 좋아하게 되면 그 언어를 배우고 싶어진다. 언어를 잘하면 그 문화를 더 제대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해외 팬들의 한글 공부 열풍에 발맞춰 국내 K-팝 소속사들은 관련 교육산업에 뛰어들었다. ‘하이브’의 자회사로 시작한 하이브에듀는 지난 2020년 ‘방탄소년단(BTS)’의 노래와 콘텐츠로 한국어를 공부하는 ‘런 코리안 위드 비티에스(Learn! Korean with BTS)’ 학습교재를 발간했다.

지난 3월 하이브에듀와 합병한 스노우의 자회사 케이크에 따르면, 이 교재는 전 세계 30여개 국가 및 지역에서 30만권 이상의 판매량을 올렸다. 이와 함께 영국 셰필드대학과 미국 미들베리대학, 프랑스 에덱비즈니스스쿨 등 7개국 9개 대학에서 한국어 강좌 정식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하이브에듀는 지난해 YG엔터테인먼트의 ‘블랙핑크’ IP(지식재산권)를 활용해 영어와 일본어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블랙핑크 인 유어 코리안(BLACKPINK IN YOUR KOREAN)’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국어에 입문까지는 안 했어도 이미 많은 K-팝 팬은 상당수의 한국 낱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아이돌(Idol)의 ‘돌(dol)’과 훈민정음을 합쳐 만든 합성어 ‘돌민정음’이라고 부른다. ‘오빠’ ‘애교’ 등과 같은 낱말뿐만 아니라 ‘치맥’ ‘볼매’ 등과 같은 유행어까지 놀라울 정도로 많은 낱말이 통용되고 있다. 스타를 응원하는 댓글은 ‘파이팅!(Fighting!)’으로 도배가 된다.

최근 K-팝 가수들은 SNS로 전 세계 팬과 소통한다. 덕분에 이곳에서 글로벌 팬층이 두텁게 형성된다. 그중 해외 팬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트위터에는 지난 2021년 한 해에만 K-팝 관련 트윗이 무려 78억개나 올라왔다. 이는 전 세계 인구와 맞먹는 숫자다. 1년 전인 지난 2020년 67억개 트윗에 비해서도 16.4%가량 증가한 수준이다.

해외 팬들이 SNS를 통해 직접 번역을 하다 보니 한국어 번역 추세 역시 변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이 제시하는 로마자표기법을 따르는 대신 읽고 소리 나는 대로 적고, 영어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면 그 단어로 대체되기도 한다. 이를 두고 조지은 영국 옥스퍼드대학 언어학 교수는 ‘팬들의 표기법(Fandom Romanization)’이라고 정의했다. 조 교수는 옥스퍼드대학 동양학연구소와 하트퍼드칼리지 소속으로, 옥스퍼드영어사전의 한국어 컨설턴트이기도 하다.

조 교수는 “SNS를 통해 개개인이 정보를 만들고 퍼트리는 상향식(bottom up) 사회에서 권위는 힘을 잃는다”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보다 각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한글을 표기한다”고 말했다. 이에 K-팝 팬덤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표기가 탄생하고, 그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생존해서 새로운 기준이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렇게 생존한 ‘팬덤 단어’ 중 일부는 공식 단어로 등재되기도 한다. 지난 2021년 옥스퍼드영어사전 (OED)에 추가된 26개 단어 가운데 ‘먹방(mukbang)’과 ‘치맥(chimaek)’ 등과 같은 낱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등재돼 있지 않은 단어들이다. ‘먹방’은 국립국어원이 만든 로마자변환법을 따랐다면 ‘meokbang’로 표기되는 게 맞지만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쉬운 철자로 썼다. ‘언니(unni)’와 ‘누나(noona)’ 역시도 공식 표기법과는 거리가 멀다. 바야흐로 한류팬들이 만들어 대중화시킨, 이른바 ‘한류어’가 탄생한 셈이다.

‘한류어가 과연 한국말이 맞나’라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조 교수는 한국인이 이 낱말들을 판단하고 배척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외래어는 원어와는 다른 형태와 의미로 새로운 언어에 정착한다”며 “단순히 한글 단어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단어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OED에 등재되는 단어들을 우리나라의 ‘콩글리시’ 단어들에 비유했다. “(콩글리시는) 한국어의 큰 자산으로, 미국인들조차 이 단어들이 쓰임새를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며 “한글 단어가 영어에 흡수된 순간, 이미 그 단어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조 교수는 마지막으로 일상화된 디지털 시대에서 언어가 기존의 규율을 깨부수고 새로운 형태로 활용되는 현상은 점점 빈번해질 것으로 봤다. 그는 “이러한 변화는 피할 수 없으며, 한국인들 또한 이를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류 역시 한국 문화에서 출발했지만 우리의 전통문화와는 다른 것”이라며 “한류를 소비하고 애정 하는 외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코리아헤럴드=최지원 기자

carri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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