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일제와 ‘1 대 1000’ 김상옥…숨 멎으면서도 빈 총 방아쇠 당겼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국가보훈처, 31일 ‘1:1000 항일 서울 시가전 100주년 기념식’

한겨레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누리집 갈무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중국에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던 김상옥 의사(1989~1923)가 1922년 12월1일 상하이를 떠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이 말처럼 김 의사는 한달 여 뒤 순국했다.

김 의사는 1923년 1월12일 일제 경찰의 심장부였던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추격하는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열흘 뒤 그는 서울 효제동에서 1000여명의 일제 경찰과 홀로 맞서 시가전을 벌이다 마지막 남은 한 발의 총탄으로 순국했다. 그의 독립 투쟁은 영화 <밀정>과 <암살>에 등장한 독립 투사의 모티브가 됐다.

서울 출생인 김 의사는 국내에서 야학교를 세워 사회계몽·민족교육 등을 벌였다. 그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192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김구·이시영·조소앙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해 조국 독립에 헌신했다.

김 의사는 1922년 겨울 서울에 몰래 들어와, 일본 총독 제거 거사 기회를 노렸다. 그는 1923년 1월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일제 강점기 때 종로경찰서(현재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8번 출입구 근처)는 독립운동가를 체포·고문하던 곳으로 일제 식민통치의 근간 구실을 했다. 특히 종로경찰서 고등계는 독립운동 탄압 전담 부서로 악명이 높았다. 종로경찰서에서 터진 폭발음은 조선 민족의 독립의지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렸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의거 뒤 “경성 천지가 물 끓듯 펄펄 끓었다”고 한다.

김 의사는 서울 남산 후암동에 몸을 숨겼으나 은신처가 드러났다. 1월17일 새벽 5시 일제 경찰 21명이 은신처를 포위했다. 일제 경찰은 돌격조와 매복조로 나눠 체포에 나섰다. 돌격조 4명에는 `종로 경찰서의 호랑이’로 불리던 유도 사범 다무라 조시치 형사부장도 있었다. 날래고 격투기에 능한 다무라가 앞장서 은신처 방문을 여는 순간 김 의사가 권총으로 그를 사살했다. 김 의사는 돌격조의 다른 일제 경찰 2명을 권총으로 쏴 포위망을 뚫고 남산으로 사라졌다.

한겨레

중국 상하이 망명 중 사진관에서 찍은 김상옥의 전신 사진.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제공


비상이 걸린 일제 경찰은 서울 시내, 인근 지방 경찰서 병력까지 총동원해 서울 전역을 뒤졌다. 당시 <동아일보> 호외는 이렇게 전했다.

“즉시 각 경찰서 정복 순사 1천여 명을 풀어 그가 도망한 남산을 나는 새도 빠지지 못하게 에워싸고 눈 쌓인 남산 전부를 수색하고 일변 수백 명 경관은 왕십리 일대와 광희정 일대를 수색하며 기마 순사가 총검을 번쩍이며 삼판통 일대를 경계하니 실로 금시에 경성 시내 일대는 전시 상태와 같았으며….”

김 의사는 서울 효제동에 숨었으나, 일제 경찰이 은신처를 알게 됐다. 1월23일 새벽 일제 경찰이 김 의사 은신처를 포위했다. 일제는 경성 시내 각 경찰서에 비상소집령을 내렸다. ‘수백 명’(1천명이란 주장도 있다)의 무장 경찰이 효제동 일대를 수십 겹 포위했다.

지난번 새벽 체포 작전에 실패한 일제경찰은 이번에는 시야를 확보하려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아침 7시쯤 일제 경찰 저격병 30명이 지붕에 올라가 대기하고, 결사대 5명이 김상옥 의사가 숨어있던 방으로 돌진했다. 벽장에 숨은 김 의사는 조준사격으로 들어오는 일제 경찰을 침착하게 물리쳤다. 포위한 일본 경찰이 “목숨을 살려줄테니 항복하라”고 회유하자 김 의사는 대응사격으로 답했다.

김 의사는 권총 두 자루를 들고 3시간 넘게 총격전을 벌였다. 중과부적에 총탄도 바닥나자 의사는 마지막 남은 권총 총탄 1발을 자신의 몸에 겨눠 자결했다. 김 의사는 죽는 순간까지 권총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동아일보> 호외는 김 의사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숨이 진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쥐고 펴지 아니하고 숨어 넘어가면서도 손가락으로 쏘는 시늉을 했다.” 검시관도 숨진 김상옥 의사가 오른손 둘째 손가락을 권총 방아쇠에 건 채 힘있게 쥐고 있었다고 전했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서 있는 `김상옥 열사의 상’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라와 겨레가 왜적에 짓밟혀 비굴한 삶을 잇느니 장렬한 의거로 죽음을 택한 대한인 김상옥 의사 애국의 횃불이 여기 영원히 타고 있다. 적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지고 떼지은 왜경과 싸우고 또 싸우다 아아 조국이여 외쳐 부르며 최후의 일발로 자결 순절하신 거룩한 님의 의거 터에 그 모습을 새겨 세워 높은 공을 기린다.”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는 김 의사의 삶과 투쟁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가난한 집안의 소년 노동자에서 영덕철물점을 창업하여 성공한 사업가로 삶을 개척했다.

△야학을 만들어 불우 청소년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자 했고, 자신도 야학과 YMCA 야간 영어반에서 공부하며 꿈을 키웠다.

△3·1운동에 참여하고 혁신단을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제작 배포하여 3·1운동을 확산시키고자 노력했다.

△혁신단 활동이 한계에 부딪히자 포기하지 않고 일제 통치의 중심을 타격하려는 더 대담한 계획으로 암살단을 조직하는 불굴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3·1운동 이후 좌절감과 무력감 속에서 단판승부로서 조선총독부가 있는 경성의 한복판에서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포위망 탈출, 1:1000의 총격전을 통해 정면도전을 하여 대한 남아의 기개와 독립정신을 보여 주었다.

△김상옥 의사는 하급 군인의 아들, 가난한 소년 노동자, 대장간 일꾼 등 사회의 특권적 지위나 대우를 누리지 못한 계층 출신임에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전 재산과 생명까지 바쳤다. 이런 보통사람들의 특별한 희생정신, 즉 비(非)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며 애국심의 근간이다. 김상옥 의사는 비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대표적 인물이다.

정부는 김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김상옥 의사를 기리는 ‘일대 천 항일 서울 시가전 승리 100주년 기념식‘을 31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연다고 30일 밝혔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호떡·어묵도 이겼다…‘겨울 간식 지도’ 1등 메뉴는?
▶▶[그때 그뉴스] “커피 한잔” 부탁 노숙인에게 점퍼 건넨 시민▶▶마음 따뜻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뉴스레터 모아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