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정·최영훈·유태평양·김수인 인터뷰
‘국립창극단의 힘’은 실력파 단원
30여년 전 이미 블라인드 오디션 도입
진화하는 창극 이끌었다는 자부심
“창극단은 꿈이자 학교, 제2의 고향”
지난 60여년 국립창극단을 이끌어온 가장 큰 힘은 단원들이다. 총 서른 네 명(창악부 28명, 기악부 6명)의 단원들은 “소리라면 모두가 자신있는 사람들”이었고, “죽어 있던 대본도 맛깔스럽게 살려내는”(오지원 국립창극단 책임PD) 귀신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창극단을 이끈 네 주역 정미정(56)·최영훈(47)·유태평양(31)·김수인(28)(왼쪽부터)이다. 임세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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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최고’ 옆에 ‘최고’가 있었고, ‘롤모델’ 옆엔 ‘롤모델’이 있었다. 국립창극단은 창단 이래 ‘꿈의 직장’이 아닌 적이 없었다.
“기라성 같은 선생님들, TV와 올림픽 무대에서나 보던 대가들이 모두 창극단에 계셨어요. 소리하는 사람들, 악기하는 사람들이 배우고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였죠. 어느 곳도 위상을 따라올 수 없었어요.”
1999년 입단한 최영훈(기악부)은 입단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2021년 입단한 막내 김수인에게도 국립창극단은 여전히 ‘꿈 같은 곳’이었다. 그는 “갈망하던 곳에 들어와 여전히 행복하다”며 “고개를 돌리면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롤모델이 있다”고 말한다.
“창극단 밖의 후배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내가 일등이 아닌 곳에 있다 보니, 배울 게 너무나 많다’고요. 내가 일등인 곳에 있으면 정말 잘하는 줄 알고 거기에 안주하지만, 저보다 뛰어난 선배들이 너무 많은 곳에 있으니 보고 듣고 배우는게 정말 많아요. 귀동냥, 눈동냥이 괜히 있는게 아니구나, 매일 그 생각을 해요.”
지난 60여년, 국립창극단을 이끌어온 가장 큰 힘은 단원들이었다. 총 서른 네 명(창악부 28명, 기악부 6명)의 단원들은 “소리라면 모두가 자신있는 사람들”이었고, “죽어 있던 대본도 맛깔스럽게 살려내는”(오지원 국립창극단 책임PD) 귀신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국립창극단의 연습실은 소리가 멈춘 적이 없다. 매일 아침 10시에 출근해 다섯 시까지 한 공간에서 연습하고 배우고 무대를 준비한다. 오늘도 더 나은 무대로 향하려 끊임없이 갈고 닦는 네 사람을 만났다. 20대부터 50대까지, 창극단을 이끈 네 주역 네 주역 정미정(56)·최영훈(47)·유태평양(31)·김수인(28)이다.
창극단을 이끈 네 주역 정미정(56)·최영훈(47)·유태평양(31)·김수인(28)(왼쪽부터). 임세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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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이미 블라인드 오디션…가장 중요한 건 '실력'예나 지금이나 국립창극단 입단은 ‘하늘의 별 따기’다. 창극단의 마지막 단원 선발은 2021년이었다. 당시에도 무려 5년 만의 신입 단원 모집이었다. 공고가 나자, 무려 45명이 몰렸다. 경쟁률은 15대1. 소리와 연기, 무용 등의 실기전형에 면접, 토론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시대에 따라 오디션의 방법도 진화했다. 1989년 1월, 대학 졸업장을 받기도 전에 입단한 정미정은 ‘블라인드 오디션’ 세대였다.
“그때에도 얼굴을 가리고 하는 오디션은 흔치 않았어요. 오로지 목소리만 보는 시험이었어요.” (정미정)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며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던 시기였다. 그 무렵 왕기석 안숙선이 출연했던 국립창극단 정기공연 ‘용마골 장사’(1986)는 남도창 위주의 창극을 서도창, 강원도 민요, 무가, 농요 등으로 음악적 확장을 시도한 작품이었다. 이러한 실험을 바탕으로 창극단에선 창극의 기본인 ‘소리’를 더 우위에 두게 됐다. ‘소리’는 언제나 제1의 단원 선발 기준이었다.
‘대가 소리꾼’ 옆에는 ‘최고의 연주자’들이 있었다. 창극단의 기악부는 대대로 그 시절 민속악과 수성 반주를 주름잡았다. 국립창극단 7대, 10대 예술감독을 지낸 명창 안숙선의 딸 최영훈(거문고)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원, 험난한 오디션을 거쳐 1999년 입단했다. 소리, 연주에 있어 최고의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뽑힌 곳이지만, ‘오디션의 끝’은 ‘치열한 생존’의 시작이었다.
“국립창극단에 입단해보니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것 중 써먹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더라고요. 모조리 새로 배워야 했어요.” (최영훈)
대다수의 단원들이 같은 마음이었다. 정미정은 “지금과 달리 1980년대만 해도 학교에선 판소리만 배웠다”며 “창극단에 들어와 소리에 안무, 연기를 더하는 것이 너무나 어색했다”고 말했다. 매일 아침 일곱 시 연습실에 가장 먼저 도착해 연습에 연습을 이어갔다.
“당시 안숙선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나이를 먹을수록 이해하고 공감하게 됐어요. 소리, 연기, 안무가 모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진중하게, 따박따박 잘하면 연기, 표정, 감정이 다 드러난다고요. 그러니 일부러 꾸미려 할 필요가 없다고요. 갈수록 그 뜻을 알게 돼요.” (정미정)
“정말 신기했던 건, 연습을 할 때 선생님들은 딱 한 번만 알려주신다는 점이었어요. ‘이제 민요 할 거야, 육자배기 한다. 여기서 손 들어, 손 내려, 한 바퀴 돌아’ 이렇게 한 번 해주고 가세요. 카메라로 녹화하던 시절도 아니라 오직 눈으로 다 외워야 했어요. (웃음) 그걸 어떻게 다들 해냈는지 모르겠어요.” (최영훈)
창극단의 모든 선배들은 곧 스승이었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선생님들의 소리”(유태평양)를 바로 곁에서 보고 배운다. 사제지간 분위기는 당연히 엄했다. 특히나 당시엔 단원들의 “예의범절은 물론 복장, 화장, 걸음걸이까지도 지적과 교육 대상”이었다. 선배들의 엄격함엔 이유가 있었다. 과거 창극을 향한 시선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창극을 ‘국악계의 종합예술’로 인식하나, 30여년 전만 해도 선입견이 있었다. 1980~90년대 지방공연을 가면 ‘창극단 배우’들을 향해 “굿각시(굿을 하는 각시, 무당)”라고 부르기도 했다. 최영훈은 “창극단을 향한 편견을 가지던 시절을 보내왔기에 (선생님들은) 더 엄하게 단속하셨다”고 돌아봤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나 민소매를 입어도 안되고, 요즘 유행하는 스모키 화장도 금지예요. 염색도 당연히 안되죠. (웃음)” (정미정) “배우든 연주자든 무대에서 쪽을 지고 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 자칫 머리가 너무 밝은 색이면 괴리가 생기는 거죠. ‘전통하는 사람이 머리가 이게 뭐냐’는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어요. (웃음)” (최영훈)
남녀 단원의 비율이 절반씩이지만, 최영훈이 입단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립창극단은 ‘보수적인 단체’였다. 임신, 출산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고, 모유 수유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최영훈은 “죄 지은 사람처럼 화장실에서 유축을 하곤 했다”며 “그 무렵을 기점으로 산모와 모유 수유 단원에게도 배려하는 문화가 만들어져 다른 공간에서 유축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 변화에 일조한 사람이 2003년 첫 아이를 출산한 최영훈이다.
2016년 입단한 유태평양은 선배들의 이야기에 “그 시절엔 너무나 무섭고, 얼음 같은 분위기였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다”며 웃었다. 젊은 단원들은 경험한 적 없는 분위기였다. 그는 “지금은 선생님들이 젊은 친구들을 상하 관계가 아닌 동료로서 존중해주고, 의견도 잘 들어준다”며 “편안하고 자율적이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소통하는 점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막내의 생각도 같았다. 김수인은 “국립창극단은 정이 많은 곳”이라며 “선생님 한 한 분이 정말 잘 챙겨주시고, 말 한 마디도 관심을 갖고 해주신다. 서로를 북돋워주는 곳이다”라고 했다.
국립창극단 2050 단원 정미정 최영훈 유태평양 김수인(왼쪽부터). 임세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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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창극’ 자부심…창극단은 '제2의 고향'창극(唱劇)은 조금씩 ‘진화’를 거듭했다. 그 변화의 중심엔 언제나 ‘국립창극단’이 있었다. 국립창극단은 늘 ‘퍼스트 무버’였고, 트렌드를 이끌었다. 창단 이후부터 우리 고유 형식의 창극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고, 2023년이 된 현재엔 ‘동시대 창극’으로 관객 옆에 섰다. 창극 형식의 크고 작은 변화를 몸소 겪은 것도 그 역사를 함께 하는 단원들이다. “수성 반주를 기반으로 하던 창극은 국악관현악으로, 서양악기의 도입으로 음악세계를 확장”(정미정)했고, 판소리 다섯 바탕에서 서양의 고전, 웹툰으로 소재를 확장하며 다양한 창작을 시도했다.
‘국악 신동’ 일찌감치 이름을 날렸고, 2000년 국립창극단의 어린이 창극 ‘은혜갚은 집’으로 창극 데뷔 무대를 가진 이후, 입단 8년차가 된 유태평양은 “지금의 국립창극단은 도전정신을 가지고 온전히 우리 것을 만들고자 하는 자세로 국악의 세계화를 위한 길을 걷고 있다”고 봤다.
장르의 틀을 넘나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전통음악의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온 ‘소리의 달인’들에겐 나름의 고충도 있었다. 익숙한 것을 내려놓고, 도전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악보 없이 창을 해온 소리꾼들이 악보에 맞춰 정확하게 노래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정미정은 “초반에는 악보에 적힌 대로 악기의 정해진 박자에 맞춰 노래하다 보니 본연의 맛이 안 살아 고민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소리의 맛’은 자고로 시김새(장식음, 특정한 음이나 가락 앞뒤에 붙어 원가락을 꾸며주는 음)에 있는데, 서양 악보는 시김새와 장단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약, 템포, 시김새 등 악보의 해석을 조율하는”(최영훈) 창극단의 창악부장 정미정은 새로운 창극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힘을 기울였다. 같은 세대의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다.
최고참 선배들의까지 이어지는 열의는 국립창극단의 완성도로 이어진다. 지난 한 해 동안 이어진 ‘작창가 프로젝트’를 통해 신진 작창가로 역량을 보여준 유태평양은 “플레이어가 아닌 창작자로 함께 하며 국립창극단은 어떤 노래와 대본, 상황도 다 씹어먹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단체라는 점을 체감했다”며 감탄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35년, 국립창극단과 함께 하고 있는 20대부터 50대 단원들의 오랜 인연은 ‘끈끈한 호흡’으로 나타나고, 그 길고 긴 정은 서로를 향한 존경과 존중으로 이어진다.
“선배들의 공연을 보다 보면 제가 한 것도 아닌데, 역시 우리는 국립창극단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방탄소년단이 거두는 성취를 보면서 ‘국뽕’ 찬다고 하잖아요. 전 선생님, 선배들을 보면서 ‘창극단 뽕’이 차올라요. (웃음)” (김수인)
국립창극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실험과 시도를 이어가는 것은 단원들의 자부심이다. 국악인에겐 다소 낯선 시도일지라도, ‘성공의 경험’을 만들어내는 역량은 또 다시 시도를 하게 되는 원천이다. 유태평양은 “당연히 국악의 소재를 쓰리라 생각한 것을 뒤집어 선보일 때가 많다”며 “‘트로이의 여인들’, ‘리어’처럼 다른 나라의 텍스트로 우리의 것을 만드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하면서 관객에게 다가섰을 때 특히나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국립창극단은 개인이나 지방 단체가 할 수 없는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통해 국내 여러 창극단이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어요. 전통의 작업들도 현대에서 바라보는 세련된 전통으로 위화감 없이 다가서고, 외국의 것을 가져와 향악화하며 새로운 창극을 보여주고 있어요. 항상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 있는 곳이에요.” (최영훈)
서로 간의 유대와 신뢰, 지치지 않는 열정, 더 나아가기를 바라는 열망은 모두가 한결같다. 매회 매진에 가까운 흥행을 이끌어주는 ‘팬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새로운 모습을 연구”(유태평양)하는 것도 한 마음이다. 오랜 시간 몸담은 이곳은 이들에게 “배움을 주는 학교”(김수인)이기도 하고, “제2의 고향”(정미정, 최영훈)이기도 하다. “모두가 가족이고 동료”(유태평양)라는 단단한 연대로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간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이곳에서 울고 웃었어요.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청춘에서 중년까지 함께 한 고향 같은 곳이죠. 우리를 한 사람으로서, 어른으로서, 예술가로서 성숙하게 해준 곳이에요.” (정미정, 최영훈)
“국립창극단에 있다 보면, 국악계 최고 실력을 가진 분들이 거치며 남겨둔 예술적 노하우를 만나게 돼요. 하물며 선생님들의 재담까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모든 역사가 축적된 곳이에요. 창극단의 지난 역사가 곧 창극단의 유산이라고 생각해요. 저 스스로도 지난 8년 동안 조금은 레벨업을 한 기분이에요. 어쩔 땐 너무 쓰지만, 결국 정신을 맑게 해주는 카페인 같은 존재가 제겐 국립창극단이에요.” (유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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