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이슈 박항서의 베트남

“이정도면 부모 잃은 슬픔”...박항서와 5년 동행 끝낸 베트남 [신짜오 베트남]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태국과의 결승 2차전 앞둔 박항서 감독의 모습.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신짜오 베트남-229]“태국에 져서 슬픈게 아니다. 사랑하는 박항서 감독님과의 이별이 가슴아플 뿐이다.”

“아버지나 선생님과 이별하는 느낌이다.”

“지난 5년간 베트남 축구 수준을 올려줘서 감사하다. 새해복 많이 받으시고 언제 어디서나 행복하셔라.”

한국 시간으로 16일 끝난 2022 아세안축구연맹(AFF) 미쓰비시컵을 끝으로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과의 5년 동행에 마침표가 찍혔습니다. 베트남 팬은 물론 한국 축구팬까지 박 감독의 ‘라스트댄스’가 우승으로 끝나길 바랐지만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태국과의 결승전은 접전이었습니다. 하노이에서 열린 1차전에서 태국과 베트남은 2대2로 비겼습니다. 태국에서 16일 열린 2차전에서 베트남은 무조건 승리가 필요했습니다. 0대0이나 1대1로 비길 경우 원정다득점 원칙에 의해 태국이 우승컵을 가져가는 구조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태국에서 선제골을 얻어맞은 베트남은 찬스때마다 실수를 연발하며 끝내 동점골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1·2차전 합계 2대3으로 뒤진 베트남은 태국의 대회 2연패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 경기는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치른 마지막 대회였습니다.

박 감독은 대회가 끝난 뒤 이같이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젠 끝이라는 생각에 편안하기도 하지만 서운하고 아쉽고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인생엔 만남과 이별이 있고 베트남 축구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나에게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베트남으로 떠날 당시 박 감독의 처지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에서 3부리그까지 내려간 ‘한물간 감독’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부임 당시 “왜 이런 감독을 데려왔느냐”는 비난 목소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박 감독 부임 전 FIFA 랭킹 136위였던 베트남은 현재 96위를 기록해 랭킹이 무려 40계단이나 점프했습니다. 특유의 ‘파파 리더십’을 통해 선수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베트남 정부가 박 감독에게 수여한 훈장만 무려 3개입니다.

박 감독과 베트남은 처음부터 5년계약을 맺은게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이 있었습니다. 박 감독도 “베트남에 5년이나 있을 줄은 몰랐다”고 회고합니다. 첫번째 계약이 만료될 시점에 이미 박 감독은 베트남의 스타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박수칠때 떠나라’고 성화였습니다. 계약을 한번 연장하고 과거 대비 성과가 나지 않을 경우 감독 인생 후반부에서 어렵게 쌓아올린 커리어마저 망가질 수 있다는 걱정섞인 조언이었습니다. 이들조차 박 감독의 화려한 우승 랠리가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라 본 것입니다.

하지만 박 감독은 어렵게 내린 ‘재계약 결정’이후 팀을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시켰습니다. 베트남팀을 2022년 카타르월드컵 최종예선에 진출시킨 것은 박 감독의 최대 업적 중 하나라고 봐야 마땅합니다. 동남아 수준에 머물던 베트남팀을 아시아 최강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강력한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예정된 이별이라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박항서를 사랑했던 수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표하고 있습니다. 박 감독의 이별을 알리는 현지 기사에는 댓글이 천개씩 달립니다. 대부분은 “박 감독을 보내고 싶지 않다. 너무 감사했다”는 내용입니다.

“안녕 감독님. 감독님이 없었다면 베트남 축구는 결코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 거예요. 관대함과 투지를 통해 축구를 아름답고 폭발적인 순간으로 만드셨어요. 건강을 기원하며 지난 여정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결승전 결과와 상관없이 박 감독님은 항상 베트남 축구 팬들의 마음 속에 있을겁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과 감독님 가족분 모두 건강하세요.”

“베트남 축구를 위해 해주신 모든 일에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가세요, 또 봐요.”

베트남 체류 당시 박 감독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치는 일화가 있습니다. 호찌민에서 열린 신한금융그룹 행사였습니다. 당시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베트남 금융당국 고위관계자가 참석한 꽤 큰 행사였습니다.

대형 호텔 그랜드볼룸이 터져나갈 정도로 사람이 모였습니다. 박 감독은 당시 베트남 신한은행 광고모델 자격으로 헤드테이블에 앉았습니다.

모든 행사에는 귀빈을 소개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이름이 불린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고 참석자들은 성의없는 박수를 좀 치다마는 그런 과정입니다.

이날 행사에서도 그랬습니다. A회장, B대표, C국장 등 이름이 줄줄이 불리었지만 상황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매일경제

2018 스즈키컵 준결승 2차전이 열린 베트남 하노이 미딩 스타디움 관중석에서 베트남 관중들이 박항서 감독 사진과 태극기를 동시에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내 아나운서가 박항서를 소개할때만은 장내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마치 터보 엔진을 단 자동차 엑셀페달을 깊숙히 밟으면 약간의 시차를 거쳐 차가 폭발적으로 앞으로 튀어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박!항!세오!’가 불린 직후 찰나의 시차를 거쳐 장내가 터져나갈 정도의 환호가 쏟아졌습니다. 그것은 목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단전에서 응축된 에너지가 성대를 거쳐 몸밖으로 쏟아지는 그런 이미지였습니다.

쉬는 시간, 박 감독은 거의 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사인을 받으려는 베트남 팬들 줄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는 베트남 역사상 가장 사랑받은 외국인 스포츠 감독일 것입니다. 그런 박항서가 베트남을 떠났습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