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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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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달리면 달라집니다" - 달리기 전도사 안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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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1년을 준비해 중국 항공사 승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같이 합격한 2백 명 가운데 199명은 조금 시차를 두고 비자가 나왔지만 이 사람에게만 취업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면 되겠지 싶었지만 합격 통지 후 1년이 다 되도록 비자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항의하고 이유를 물어봐도 설명은 없고 기다리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실망이 황당으로, 황당이 좌절로 이어졌고 몇 달을 눈물로 지새웠다. 어머니는 그토록 중국이 가고 싶다면 굿이라도 해주겠다고 했다. 굿판에 앉아 있는 어머니 모습을 생각하니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 대목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방울진 눈물이 턱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직도 그때의 좌절감과 아픔을 눈물 없이는 돌아보기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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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평일 아파트 단지 안에서 혼자 울고 있는 것도 민망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고 나니 신기하게도 숨통이 트였다. 막힌 가슴이 터지는 느낌, 살아 있는 느낌이었고 모처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다음 날도 달렸다. 달리는 시간이 5분에서 10분, 10분에서 20분, 한 시간으로 늘었다. 남처럼 지내던 가족들에게도 말을 건네기 시작했고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달릴 때만큼은 너무나 행복했다. 회사 다닐 때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가족들이 말도 못 걸 정도로 얼굴이 어둡고 피곤해 보였는데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 밝아지고 말수도 늘었다. 부모님부터 달리기를 통해 딸이 달라진 것을 인정하고 '네가 진짜 행복하면 행복한 걸 하라'며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달린 것이 2016년 4월, 그로부터 6개월 뒤에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했다. 훈련이 충분치 않아 '30km 이후에는 거의 기어서' 결승선에 들어왔지만 그 성취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매일 새벽 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주말이면 전국에서 열리는 각종 달리기 대회에 참가했다. 자신의 달리는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꾸준히 올렸다. '달리기 전도사'로 자처했고 사람들이 그 말을 자연스레 인정하기 시작했다.

- 2017년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본인이 달리기로 유명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죠?

"몰랐죠. 타이밍이 굉장히 잘 맞았던 것 같고요. 제가 달리기를 시작할 때만큼만 해도 아직 달리기 붐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때가 유명한 분들이 생겨나는 그런 시점이었던 것 같고요. 아직은 많은 분들이 있지 않아서 조금만 열심히 하면 금방 눈에 띄게 될 수 있었던 타이밍에 제가 좀 빨리 잘 시작하게 된 것 같아요."

달리기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난해 10월 런던 마라톤까지 마라톤 풀 코스는 열두 번, 100km를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은 세 번 완주했다. 일주일 동안 250km의 몽골 고원 황야를 달리는 고비 사막 마라톤도 완주했다. 160km의 서울 둘레길을 37시간에 걸쳐 달리기도 했다. 수영 1.5km, 사이클 40km, 달리기 10km를 하는 철인 3종 경기도 두 차례 경험했다.

처음에는 사비를 털어 해외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지만 이름이 알려지면서 후원하겠다는 기업이 줄을 서 있다. 뉴욕, 베를린, 런던, 시카고, 도쿄, 보스턴 등 세계 6대 마라톤 대회를 모두 완주했는데 이 가운데 베를린 마라톤 등 3곳은 자비로 참가했지만 런던을 비롯한 나머지 세 대회는 기업이나 여행사의 후원을 받았다. 달리기 대회 참가비 3만 원, 5만 원도 아까웠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달리기 행사에 참가하고 홍보해주는 대가로 많을 때는 수백만 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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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안 대표님이 어디 대회를 나간다 그러면 후원하겠다는 업체들이 줄을 서 있는 거겠죠.

"네. 협찬하고 싶어 하시는 브랜드도 많고요. 저 말고도 이제 <탑 걸즈 크루>*를 협찬하고 싶어 하는 브랜드들도 정말 많아요."
*안정은 대표가 기획한 여성 달리기 이벤트

- 정말 많아요?

"많아요. 화장품은 제가 기간으로 계약을 해서 줄을 서 있고 화장품 말고도 의류도 있고요. 마시는 것도 있고 먹는 것도 있고 다이어트 제품도 있고 여성 관련 제품도 있고 정말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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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런더풀이라는 달리기 기획사를 세웠고 <나는 오늘 모리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를 비롯해 모두 4권의 책을 냈고 달리기와 코칭 서비스 분야 유명 강사가 되었다. 수원에 이어 얼마 전에 서울 성동구에도 베이커리 가게를 냈다. 빵도 먹고 달리기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8만 7천 명이 넘고 이 사람 강연은 거의 늘 만원이다. 지난달에만 20번 넘게 강연을 했다. 달리기 인연으로 만난 남편과 결혼을 했고 올해는 엄마가 된다. 직업에서 남편까지, 달리기로 자신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금은 셀럽이라고 불릴 만한 유명인이고 거쳐온 직업들도 겉으로 보면 그럴듯하나 사실은 눈물과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 생활은 6개월 만에 끝났고 1년 넘게 준비해 중국 항공사 승무원 시험에 최종 합격했지만 한중 사드 갈등 와중에서 취업 비자를 받지 못해 승무원 꿈이 물거품이 됐다. 대기업 계열 호텔 마케팅팀에서 일했는데 한 달 실제 급여가 130만 원 남짓한 비정규직 자리였다. 대학 때부터 연극배우에 뜻을 두고 대학로 연극 무대에도 올랐지만 무명 배우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일을 더 했고 자격증이 열 개 가까이 되지만 자격증이 많고 경험한 직업이 다양하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 사람이 말하지 않은 실패와 좌절은 더 많았을 테니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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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반에서 달리기는 1등이었고 계주 선수로 뽑히면 일주일 전부터 연습을 했다. 그렇지만 누구로부터도 달리기 선수를 해보라는 제안을 받은 적은 없었고 달리기를 취미나 특기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달리기에 재미를 붙인 뒤 혼자 꾸준히 연습을 했다. 겨울에는 트레일 러닝에 대비해 등산을 했고 일부러 무거운 가방을 메거나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기도 했다. 달리기에 필요한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얻긴 했지만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다. 10km 최고 기록은 44분, 마라톤 풀 코스를 4시간 안에 달린 기록도 있지만 이제는 4시간 30분 정도로 '여유 있게' 달린다.

- 달리다가 포기하신 적도 있으시겠죠.

"근데 한 번도 없어요."

- 그러세요.

"물론 꼴등한 적은 굉장히 많아요. 근데 사실 철인 3종도 제가 두 번 완주하긴 했었는데요."

- 철인 3종 경기에서는 컷오프된 적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맞아요. 그러니까 두 번 완주하긴 했는데 사실 두 번 다 정상적인 완주는 아니에요. 첫 번째는 자전거를 탈 때 컷오프를 당했어요. 그래도 달리기하고 끝까지 들어가면 메달은 받을 수 있다고 하셔서 그러면 기록 없더라도 끝까지 달릴게요 하고 기록 칩을 반납하고 대회에 들어왔고요. 그래서 당연히 기록은 없고. 두 번째 철인 3종 했을 때도 그때는 수영 연습을 조금 해서 규정 시간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그 기록을 보니까 그것도 컷오프가 됐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도 메달을 받긴 했지만 정상적으로 완주를 제대로 해낸 건 아니라서 다시 한번 도전을 하긴 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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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가 좋지만 여전히 힘들다고 했다. 100km를 달리면 100번, 42.195km를 달릴 때면 40번 넘게 포기하고 싶다. 어떤 때는 불과 100미터를 달릴 때도 중간에 포기할 이유를 찾는다고 했다. 그래도 자신을 결승선에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가족을 생각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낸다고 했다. 이제는 달리기 대회에 가면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포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힘들 때면 자신을 국가대표라고 생각하며 뛴다.

"'나는 국가대표다'라고 생각하면서 뛰면 포기하고 싶다가도 포기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냥 한 명의 러너가 아니라 내 왼쪽 가슴에는 태극마크 달려 있고 온 국민이, 전 세계 사람들이 나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나를 보고 응원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진짜 국가대표라는 그런 책임감 때문에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 외국에 가서 달릴 때 특히 그러신 거겠네요.

"한국에서도 그런 생각하면서 뛰어요."

- 국가대표로 선발된 적은 없잖아요?

"없죠. 없죠. 마인드를 그렇게 하는 거죠. 마인드 셋을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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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고비 사막을 달릴 때 동영상을 보면 양발에 살이 보이는 부분이 없을 만큼 테이핑을 한 채 발을 심하게 절고 있다. 게다가 숙소에서 운동화 한쪽이 불에 타 손상되는 바람에 쿠션 기능이 없었고 발의 좌우 균형이 맞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2kg의 배낭을 메고 250km를 달리는 과정은 극한의 고통이었다.

- 사실은 체력이 바닥나고 물리적으로 아프면 못 뛰는 거잖아요. 너무 힘들고 아프면 뛰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거의 마지막에 하루 이틀 정도 남겼을 때는 너무 힘들어서 계속 울면서 걸었어요. 엉엉 울면서 진짜 힘들게 걸었는데 그때 옆에 같이 달려준 한국 분이 계셨었거든요. 그분이 '그냥 빨리 가자, 울어서 뭐 해 빨리 가자' 이렇게 하면서 같이 달린 덕분에 완주를 했지 만약에 제가 혼자 달렸었으면 그때 그냥 주저앉아서 울거나 뒤에서 따라오는 호송 차량 타고 그냥 경기를 중단했을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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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라톤 풀코스 완주 후유증으로 거의 6개월을 달리지 못했고 고비 사막 마라톤 대회에서 입은 부상으로 한동안 고생했다. 지명도가 급등하던 2020년,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아 타격이 컸다. 걸려 오는 전화 대부분이 강연이나 행사 취소 통보여서 한동안 전화벨만 울려도 경기를 일으켰고 몇 달 동안 수입이 0원이었다. 계획했던 행사가 줄줄이 취소됐고 2020년 3월 예정이었던 결혼식까지 연기해야 했다. 제대로 운동을 못해 체중이 늘면서 우울증과 대인 기피증에 시달렸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대상포진까지 왔다. 그래도 달리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2020년 6월 결혼식 때는 면사포를 쓰고 신랑과 함께 한강을 달리는 이른바 버진런(virgin run)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아프리카 식수 위생 지원 사업에 기부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어제의 나와 비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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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2020년 5월 브라탑만 입고 달리는 <탑 걸즈 크루>(top girls crew)를 기획했다. 해외에서는 여성들이 브라탑만 입고 자유롭게 달리는데 우리나라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있느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나 좋아하는 거, 나 편한 복장으로 남들 시선 같은 거 개의치 말자고 자유를 만끽하자는 이 기획은 대성공이었다. 신청을 받은 지 1분도 안 돼 33명의 정원이 채워졌다.

"외국에서 보면 자신이 아무리 뱃살이 있어도 그냥 멋있게 운동복을 입고 운동을 하시잖아요. 근데 우리나라는 아직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고 내가 입고 싶은 옷보다는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달리기를 막 시작했을 때는 내가 달리는 모양새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혹은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운동복을 사람들이 비웃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했었단 말이죠. 그래서 '당당하게 브라탑만 입고 달리는 여자들의 크루'를 한번 만들어 보자…"

33명의 여성이 속옷으로 여겨지던 브라탑을 입고 떼 지어 달리면 눈총을 받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반응은 의외였다.

"인스타에 반응을 보려고 올렸어요. 근데 여자분들 댓글이 엄청 많이 달리는 거예요. '저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죽기 전에 해보고 싶었던 거예요, 혼자라면 어려운데 같이 해보면 가능할 것 같아요'라는 댓글이 많이 달렸길래 거기서 용기를 얻어서 딱 시작을 하게 됐죠… 다 같이 스포츠 브라탑만 입고 달리기를 하니까 공원에 앉아 계시는 어르신분들께서 너무 멋있다고 어디서 온 처자들이야? 이렇게 물어보시기도 하고 같이 뛰려면 어떻게 뛰어야 되는지 그런 것도 물어보시기도 하고…"

<탑 걸즈 크루>는 일 년에 세 기수, 한 번에 33명을 모집한다. 지금까지 여섯 기수가 나왔고 올봄에 일곱 번째 기수를 모집할 예정이다. 33명이라는 숫자는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에서 따 왔단다. 매 기수 첫 모임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어제의 나와 비교한다" "아무리 뱃살이 나와도 내 뱃살이 가장 예쁘다는 마음으로 달리기를 한다"는 내용의 선서를 한다. 페미니즘 같은 것은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고 했지만 이런 말을 할 때는 여성 운동의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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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달리기를 할 때조차 여성들이 느끼는 차별이나 제약이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제약이나 차별 이런 것보다는 다들 옷을 입고 뛰다가 브라탑만 입고 달리기는 처음 해보시는 분들이잖아요. 근데 다들 똑같이 말씀하시는 게 '이렇게 맨몸에 바람을 맞고 달리니까 이렇게 시원한 건지 몰랐어요, 너무 자유로워요' 하시는 말씀이 가장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뭔가에 얽매여서 못 했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난생처음 느껴보는 바람과 난생처음 해보는 그런 일탈 같은 느낌이 나를 더 단단하고 자신감 있게, 또 달리는 내내 웃게 되면서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의 매력은 눈으로 확인되고 삶으로 검증된다. 당신은 젊고 멋지니 자신의 몸을 드러내며 달릴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젊은 육체가 주는 매력이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는 것을 잘 알지만 달리기의 매력은 그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당연히 나이가 들면 지금처럼 건강하게 오래달리기는 못 할 수는 있겠죠. 근데 저는 임신을 해서 그냥 배가 나온 상태로 달리는 모습을 일부러라도 더 많이 보여드리고 싶고 나중에 아기 낳아서도 유모차를 끌면서 혹은 애를 등에 태우면서 달리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싶어요. 달리기는 2030의 전유물이 아니라 결혼을 해서도, 배가 나오고 좀 처졌어도, 애를 육아하면서도 얼마든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저는 아이들도 더 많이 낳고 싶기도 하고요."

달릴 때 내 안에서 솟구쳐 나오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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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국어는 별로 재미있는 과목이 아니었고 수능 국어 성적도 6등급이다. 글쓰기를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달리는 동안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이야기들을 책으로 만들고 싶었다. 책을 써야 남들과 차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메모를 하고, 녹음할 수 있으면 녹음도 하면서 거의 6백 쪽 가까운 원고를 준비했다. 원고를 수십 군데 출판사에 무조건 보냈고 몇 군데서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2019년 초 첫 번째 책을 내고 너무 부끄럽고 낯간지러워서 한 번도 자기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다가 지난가을에야 처음으로 정독했다. 자기가 썼지만 꽤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책상 위에서 쓴 글이 아니라 달리면서 쓴 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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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인가요?

"부끄럽지만 진정성도 그렇고 '달리기라는 주제 하나로 이런 다양한 생각을 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지금은 달리기를 일로 하고 있는데 그때는 정말 순수하게 좋아서 치유받기 위해서 취미로 하다 보니까 달리기에 대한 애착과 즐거움이 그 책에 더 담겨 있기는 하더라고요."

- 책을 쓸 때 나는 달리기로 돈을 벌고 또 유명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셨어요.


"네. 저는 그때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때 달리기가 조금씩 붐이 되고, 달리기 행사도 많아지고 기업과 콜라보를 하는 것들이 많아지다 보니까 달리기로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부모님 설득을 했던 것 중에 하나가 내가 퇴사하고 1년 안에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내겠다, 책 한 권 나오면 그걸로 강연을 하든 뭘 하든 뭐라도 시작을 하겠다. 만약에 책 한 권 내지 못하면 그냥 다시 잠자코 회사 다니겠다고 했더니 부모님께서 그래 1년이니까 너 하고 싶은 거 한번 해봐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정확하게 회사 그만두고 1년 만에 책을 한 권 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달리기 관련 이벤트 사업을 시작했고 코로나 시대에 자신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자 베이커리 사업으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다시 어려움을 만나면 그 어려움의 밑바닥에서 만나는 일로 세 번째 직업을 삼고 싶다는 말을 할 때 이 사람은 확실히 낙관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를 마케팅과 연결해서 어떻게 사업을 키울 것인가 고민하고 성공에 대한 욕망이 커진 것도 사실이지만 세상을 보는 눈도 깊고 넓어졌다. 이 길이 끝나는 길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늘 항상 즐거운 일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시련도 있을 테고 뭐 실패도 있을 테고 망해 가는 시점도 있을 텐데 만약에 그런 순간이 한 번 더 온다면, 물론 안 오면 더 좋긴 하겠지만 그런 순간이 한 번 더 온다면 그때 만나는 무언가를 통해서 그걸로 한 번 더 직업을 해보고 싶어요."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은 것보다 달리면서 배우고 깨달은 게 더 많다. 같이 달리는 사람이 경쟁자인 동시에 동료라는 것도 달리기에서 배운 것이다.

"10km는 사실 혼자 달리는 게 편한데 40km, 100km, 200km가 넘어서면 절대 혼자서 완주를 못 하더라고요. 함께 같이 달리면서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도 더 많이 알게 됐고요. 그렇게 되면서 그전에는 뭐 질투를 하거나 샘을 냈던 사람들이 이제는 질투나 샘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있어야지만 더 멀리 달릴 수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게 더 정신적으로 저에게도 편안해진 것도 있는 것 같아요."

- 달리기 인플루언서들이 많이 계시잖아요. 그런 분들 사이에서도 경쟁 같은 게 있습니까.

"초반에는 경쟁을 저도 느꼈었던 것 같아요. 더 잘 달리고 싶고 더 유명해지고 싶고 더 대단한 일을 하고 싶고 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주변에서 먼저 경쟁 구도를 만들기도 하고요. 굉장히 부담스럽고 스트레스도 정말 많이 받고 그러긴 했었는데 요즘은 다들 그런 분들이 다른 분야를 걷고 계셔서 사실 겹치는 게 많이 없기는 하더라고요. 어떤 분은 해외 마라톤을 많이 나가는 분도 계시고 또 어떤 분은 전문 코칭 쪽으로 가시는 분들도 계시고 뭐 하다 보니까 다들 길이 조금씩 갈라지게 되면서 지금은 다 그렇게 경쟁을 느끼거나 그러지는 않은 것 같아요."

당당한 '관종'



자신의 어떤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어필하는지,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소비되는지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늘 고민하는 사람답게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비칠지 민감하다. 자신의 달리는 자세와 달릴 때 표정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말 한마디, 글 한 줄까지 신경을 쓴다고 했다. 스스로 관종이라고 했다. 관종이라는 말에서 부정적인 느낌을 받곤 했는데 이 사람 입에서 나오는 관종이라는 말은 당당함의 표현으로 들렸다.

"그냥 관종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관종이기도 하고요. 뭐 누구나 사랑받고 싶고 누구나 관심받고 싶고 그런 건 똑같은 것 같아요."

달리는 모습을 자신이 직접 찍고 직접 편집해서 SNS에서 올린다. 이런 모습을 연출되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SNS에 올린 것 외에 이 사람의 다른 모습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사실 쓰레기를 주우면서 뛰는 폴로깅 이벤트, 수원 화성을 비롯한 경기도 문화 유적지를 달리는 행사, 브라탑을 입고 여성들이 단체로 달리는 <탑 걸즈 크루> 행사는 기획된 이벤트고 일종의 상품이다. 250km 고비 사막을 달리는 것도, 시각 장애인의 손을 잡고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는 것도 다 자신을 알리고 보여주려는 노력이다. '국내 최연소 세계 6대 마라톤 완주자' 같은 말에서는 기획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결혼식 당일 신랑과 면사포를 쓰고 뛴 이벤트는 그런 연출과 기획의 정점이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의 달리는 모습이 만들어진 가공은 아니다. 달리기는 보여지는 것보다 보여지지 않는 것이 훨씬 많고, 말과 글은 물론 영상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과정의 연속이다. 어떤 첨단 기기도 달리는 사람의 고통, 외로움, 분투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이 사람의 성취가 '연출'과 '기획'에 힘입은 것일지 모르지만 그 밑바닥은 이 사람이 흘린 눈물과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다. 화려한 카메라 워킹이나 편집의 마술로 얻어진 것들이 아니고,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이다.

- 안정은에게 달리기는 뭘까요.

"저에게 달리기는 위로인 거 같아요. 달리기를 하면 혼자 생각하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혼자 곱씹어 보고, 혼자 내 호흡을 듣고, 내가 움직이고 싶은 만큼 발을 내딛고, 발을 내닫는 만큼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그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힘들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서 미웠던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면서 저도 마음속으로 위로를 많이 받게 되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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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행사와 연계해 기부와 선행을 몇 년째 하고 있다. 성탄절이면 가족들이 모두 나서 수원에 있는 한 어린이 보호 시설을 찾아 아이들과 놀아주고 선물도 전달한다. 좋은 취지로 하는 달리기 대회가 있으면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고 함께 달린다. 기부가 남을 위한 일이지만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 기부를 하면서 자신의 이미지가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거 같아 기분이 좋다고 했다.

- 달리기로 좋은 일 많이 하시는 데 선한 마음도 있을 테지만 한편으로는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하는 것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기부나 선행은 저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제가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뛰어봐서 알잖아요. 고비 사막 마라톤은 250km잖아요. 그건 상상도 못 할 거리잖아요. 이거는 진짜 분명 포기하고 싶을 텐데, 그 대회에서 실격하고 한국으로 돌아올까 봐 제가 장치를 마련한 게 소아암 환우한테 기부를 하는 거였어요. 그러면 나를 위한 달리기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을 위한 달리기 그리고 그 아이들을 응원하기 위해서 함께 기부를 해주셨던 수많은 분들이 있을 거잖아요. 그래서 함께 도와주신 분들의 성함을 적은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배낭에 넣고 달렸어요. 진짜 힘들 때마다 그거 꺼내 보고 매일매일 그날의 레이스 끝나면 그거 들고 사진 찍고 그렇게 했었거든요. 그거 덕분에 진짜 집에 가고 싶었는데 꾹 참고 완주할 수 있었던 것도 있죠."


이 사람보다 잘 달리는 사람도 많고, 더 많이 달린 사람, 더 멋있게 달리는 사람, 더 탄탄한 몸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이 사람이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스토리의 힘이다. 스토리의 힘을 알고 스토리가 뭔지를 아는 사람이다.

- 안정은이라는 달리기 인플루언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스토리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요.

"동의합니다. 너무 쉽게 동의를 했나요. 제가 마케터 출신이다 보니까 스토리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간혹 대학교에 가서 마케팅 관련된 혹은 덕업일치에 관련된 강의를 할 때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나의 스토리가 무조건 있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없는 사람과 그 사람만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너무 다르잖아요… 저도 어떻게 보면 스토리가 잘 마케팅이 됐죠."

- 달리기로 어느 정도 돈을 벌고 계시나요.

"1년 연봉을 한 달에 벌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그럴 때면 진짜 밤낮 평일 주말 없이 계속 달리죠. 하루에 세 번 달리기도 하고 새벽 1시에 출근해서 빵을 만들기도 하도 그렇게 일하죠. 그런데 그렇게 일하면 금방 아프더라고요."


달리기가 이제는 일이 되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직업으로 하는 것은 취미로 하는 일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 달리던 그때로 제가 돌아갈 수는 없겠죠. 뭐 생각도 더 많아질 테고 점점 더 조심스러워질 테고. 왜냐하면 잃을 게 많다 보니까. 그렇게 될 텐데 그래도 달리기를 처음 시작했던 그 절실함이랑 그 본질만큼은 잊지 않으려고 하고 있어요."

첫 번째 달리기 경험은 즐겁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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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새해를 맞아 달리기를 시작해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달리기를 통해 모든 것이 달라지는 '기적'을 체험한 '달리기 전도사'의 말이다.

"사실 달리기를 시작한다고 해서 당신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뀐다고는 말씀을 드리진 못해요. 근데 하루하루가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이 바뀌고 한 달이 바뀌고 어느새 내 주변에 있는 지인들의 모습도 바뀌게 될 거라고는 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 그런 분들한테 조언을 주신다고 하면 어떤 말씀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무조건 첫 번째 경험을 즐겁게 하라고 말씀드리고 있어요. 다들 처음에 시작하시면 '아 그래 30분 뛰어야지, 5km 뛰어야지 하고 정말 큰 목표를 세우시잖아요' 그런 목표도 좋기는 한데 너무 힘들게 완주를 하시면 당연히 그 첫 번째 경험이 너무 힘들다 보니까 두 번째 경험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냥 5분만 달리더라도 1km만 달리더라도 첫 번째 경험을 즐겁게 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성취감을 느끼시면 그다음 도전도 그다음 도전도 조금 더 쉽게 하실 수 있고 그다음 기회도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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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호(논설위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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