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만난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72)는 2022년은 그동안 흔들려오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크게 도전받은 해였다고 설명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 속에서 고속 경제성장과 정치 민주화를 달성한 한국으로서는 힘든 상황일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약화하고 보호주의 블록화가 심화할수록 한국 외교는 더 정교해져야 한다. 윤 교수는 한·미동맹 강화,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윤석열 정부 외교 방향에 동의하면서 대중외교에서는 희망적 사고보다 전략적 관점의 접근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경제력으로 세계 10위권이자 소프트파워 강국인 한국이 국제적으로 적극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 겸 전 외교부 장관이 2022년 12월 21일 경향신문사 여적향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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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동북아 정세에 가장 상징적 사건은.
“지난 10월 중국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다. 집권 1,2기인 지난 10년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덩샤오핑(鄧小平) 이래 중국의 전략 기조에 세 가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집단지도체제의 사실상 폐기, 미·중 대결 심화, 경제 운용에서 당과 이데올로기 역할을 강화해 민간기업보다 국유공기업을 더 중요시하는 방향을 가고 있다. 이 같은 기조가 최소 5년 간 지속될 것같고, 이는 향후 미·중관계, 동북아와 전 세계에 미칠 파장이 상당히 클 것이다.”
-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을 총평한다면.
“7개월 여밖에 되지 않아 평가하기 이르다는 점을 전제로, 외교정책을 수립·실행해 나가는 데 있어 먼저 국제환경을 진단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이슈는 북한 문제다. 지난 정부가 여러 노력을 했지만 북한 비핵화, 남북 평화 정착은 이뤄지지 못한 게 현실이다. 오히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 북·미관계가 함께 악화됐고 지난해 북한 미사일 등 안보 위협이 고조됐다. 북한의 안보 위협 억제는 한국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한국은 앞으로도 경제·민주주의 발전을 해야 되기 때문에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크게 유리하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질서에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고 독자적 영향권을 형성하려고 한다. 이 두 가지를 고려할 때 한·미동맹 강화하고 한·일관계 개선하며 국제정치 무대에서 글로벌 중추국가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윤 정부의 외교는 큰 방향은 맞다고 본다.”
- 최근 윤 정부가 발표한 한국의 인·태전략을 평가한다면.
“상당히 오래전부터 한국이 성장한 국력에 상응하게 외교의 지평을 넓혀야 된다는 이야기가 있어왔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넓혀야 될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체계를 갖춰 문서화한 적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보고서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앞으로 4년여 동안 실제로 그것을 이행하느냐 아니면 구두선으로 그칠 것이냐 이다. 과거 여러 정부들도 여러 비슷한 구상들을 내놓았지만 대개 북한, 미국, 일본, 중국 문제에 매몰되어 실천되지 못했다. 글로벌 중추국가를 내세운 이번 정부는 정말 다르기 바란다. 이것의 실행을 위해서는 최고 정책결정자 레벨에서의 강력한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다. 지금의 보고서는 그동안 정부가 취해온 입장들을 벗어나 새롭게 중국을 자극할 만한 부분이 없다. 중국이 반발한다면 그것은 온당치 않다고 본다.”
지난해 동북아 정세에서 가장 상징적 사건은 중국 20차 당대회
- 바이든 정부가 자유민주주의 동맹 규합에 나섰지만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서 균열이 생겼다.
“바이든 정부가 2022년 내놓은 전략보고서를 보면 투자, 동맹, (중국과의) 경쟁 등 3가지를 이야기한다. 국내 투자 늘려 미국 경제 실력을 키운 후 동맹국과 연대를 더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중국과 경쟁하겠다는 것이다. 국내 투자와 중국과의 경쟁 전략을 잘 만들고 있지만 동맹국·우호국 연대 전략이 취약하다. IRA에 대한 한국, 유럽의 저항을 설득하고 미국과 동맹국이 상호혜택을 볼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한국 입장을 설명하고 요구해야 한다.”
- 미국의 반도체 동맹 칩4(한·미·일·대만) 가입에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산 제품에 고관세를 부과하면서 미·중 무역전쟁이 시작됐고, 무역뿐 아니라 외교·군사·기술·이념 등 여러 전선에 걸쳐 대결 구도가 심화됐으며 공급망 분리 상황까지 벌어졌다. 2018년 이전에 한국은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으로 혜택을 봤지만, 더 이상 이런 구조가 유효하지 않다. 경제와 군사안보가 연계됐고, 양자택일을 요구받고 있다. 칩4는 가입해서 얻는 이득이 손해보다 클 것이다. 가입하지 않으면 대중 반도체 수출은 유지되겠지만 미·일·대만 등 국가 간에 형성되는 네트워크에서 소외되고 기술이나 표준 협력에 끼지 못한다. 중장기적으로 큰 손해다. 반도체 이후 차세대 분야로 넘어가는 데도 뒤처진다. 칩4에 가입하되, 대중 수출 감소 우려에 대해서는 대체 지역을 찾는 방안이 합리적 선택이다.”
윤영관 서울대 영예교수 겸 전 외교부 장관. 김창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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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회로 시진핑 1인 시대가 시작됐다. 대중 외교전략은 어때야 하나.
“국익 관점에서 자유주의 질서의 유지와 강화라는 전반적 방향을 먼저 설정해야 한다. 그런 방향에서 미국과의 관계와 일본과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응을 보면서 최대한 우호적인 대중 관계와 공통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고려할 사항은 중국은 북한이든 남한이든 한반도 문제를 미국과 전략 경쟁 맥락에서 일종의 종속변수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의로 행동하면 중국도 선의로 반응할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보다 전략적 사고로 접근해야 한다. 상호 주권 존중과 호혜의 원칙, 한국에 있어 민주주의와 한·미동맹의 중요성에 대한 존중 등 원칙을 가지고 대중 외교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만 문제는 미·중 경쟁 구도에서 시한폭탄“
- 미·중 관계, 대만 문제에 대해 한국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
“대만 문제야말로 미·중 경쟁에 있어 시한폭탄이다. 시진핑 정부가 전략적 목표로 내걸고 있는 중국몽의 핵심이 대만 통일이고 임기 내 대만 통일을 공언한 바 있다. 대만 문제는 미·중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다른 지역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대만 무력 통일을 막지 못한다면 국제적 리더십은 완전히 추락하고 동맹국들의 신뢰도 바닥에 떨어진다. 한국과 일본으로서는 해상무역로가 중국 해군에 의해 위협받고 중국 해군이 우위를 점하는 서태평양에 둘러싸여 고립되는 상황이다. 더 걱정은 미·중이 냉전시 미·소 관계와 달리 소통 채널이 굉장히 취약하다는 것이다. 밥 우드워드의 <위험(Peril)>을 보면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이 2020년 11월3일 미 대선을 사흘 앞두고 리줘청(李作成) 중국 연합참모장과 비밀리에 통화해 미국의 선제공격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런 상황에선 오해, 오판, 과잉대응으로 통제불능 상태로 빠지면서 무력충돌로 확전될 가능성이 커서 대단히 위험하다. 대만해협 상황과 미·중 국내 정치 상황은 수시로 변한다. 한국은 변화하는 상황에서 국익을 고려해 적합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현재 미·중관계나 한반도 주변 상황에선 문재인 정부가 마지막 한·미정상회담에서 밝힌 ‘대만해역의 안정과 평화가 중요하다’는 입장 정도가 적합하다.”
- 일본이 안보문서 개정을 통해‘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를 천명했는데 동북아 안보에서 갖는 의미는.
“충분히 예측가능한 사안이었다. 미국은 오래 전부터 일본이 경제력에 상응하는 군사적 역할을 해 동북아 안보에 기여하기를 희망했다. 미국만이 동북아 안보 유지의 부담을 감당하고, 세계 경제력 3위 일본이 무임승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일본이 군사적 정상국가화 방향으로 나가도록 독려해왔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공세적으로 변한 중국에 맞서 일본이 함께 견제에 나서주길 바랬고 일본 자민당 정치 지도자들도 충실히 협조했다. 한국이나 다른 이웃국 관점에서는 일부 일본 보수 정치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수정주의적인 역사관이 문제다. 아베 신조 총리 이후에 그런 정치적 분위기가 형성됐고, 과거사를 깨끗하게 청산 못하고 주변국들의 의구심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중요한 안보적 역할을 하려하니까 일본에 대한 신뢰 부족으로 불안감을 느끼는 딜레마가 있다. 한국은 미국이 일본을 적극 독려해 과거사 문제를 책임감 있는 자세로 해소함으로써 신뢰를 얻고, 일본이 더 중요한 안보 역할을 하는 데 주변국들도 협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중국이 즉각 반발한 것에 비해 한국은 애매하고 미묘한 입장을 밝혔다.
“미국과 동맹인 일본이 군사적 대국화가 된다면 결국 중국을 겨누게 될 것이란 예측 때문에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고 북한의 안보 위협에 일본과 공동 대처하고 있다. 한반도 유사 사태 발생 시 일본은 후방기지인 셈이라 중국 입장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 보수 정치 지도자들의 수정주의 역사관이 문제지만 우리가 안보 위협을 받는 급박한 현실 앞에서 한·일 군사 협력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입장이 미묘할 수밖에 없다. 가능하다면 일본이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더 전향적이고 전진된 자세를 취해 의구심을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책임있는 자세로 해소해 신뢰 얻어야
- 윤석열 정부가 일본과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인데 일본 호응에 따라 더 어려워 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윤석열 정부가 상당한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강제징용 소송과 관련해 대법원에 의견서를 보내기도 했지만 일본이 호응하지 않으면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지 않느냐는 지적은 충분히 가능한 관측이다. 다만 조금 희망적으로 보면 반대로 윤 정부가 국내 정치적 비난과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조치를 취했다는 것 자체가 과거 정부와 달리 한·일 관계 개선 의지와 진정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정치인들이 이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태도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측면도 있다.”
- 미·중, 한·중이 북한 문제에 의견이 다른데 중국이 북핵·미사일 위협 억제에 역할할 수 있을까.
“과거 30년간 비핵화 외교를 보면 중국은 항상 소극적이었다. 비핵화보다 북한의 체제 안정을 더 중시하고, 대북 영향력 유지를 위해 대북 압박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미·중이 대립의 길로 가면서 상호 이득을 볼 수 있는데도 협력하지 않는 대표적 사례가 북 비핵화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유엔 안보리 추가 대북 제재나 비난 성명에 반대했다. 미국 사람들과 얘기해보면 중국에 북한 비핵화 협력을 요구하면 다른 미·중 현안에 대한 일종의 대가를 요구한다고 한다. 별개의 독립적 상황을 연계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미·중 대립으로 중국의 긍정적 역할 기대는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김창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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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중 갈등 격화 상황에서 동북아 경제협력 가능성이 있는가.
“더 약화되고 있고, 오히려 동북아에서도 미국 및 중국 중심의 경제 네트워크가 분리되고 있다. 자유로운 경제협력 질서의 모색 가능성이 약화되고, 중국까지 포함한 다자적 협력 메커니즘은 당분간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입장에서는 최근 인태전략보고서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2011년 설립된 한·중·일 3국협력의 활성화를 고려해볼 수 있다. 3국 협력을 추진하기 위해선 한·일 관계 개선이 필요한데 한때 동북아평화구상을 내세우면서도 한·일 관계는 개선하지 못했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 필요하다. 윤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 추진에 그치지 않고 외교적 상상력을 동원해 한·중·일 3자 협력 메커니즘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의미 있을 것이다.”
- 미·중 갈등 격화 상황에서 동북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한국의 외교책은 무엇인가.
“미·중 양극화는 결코 한국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안미경중의 프레임워크가 불가능하고 경제와 안보 에서 미·중 한쪽을 선택하도록 압박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동북아가 아닌 글로벌 차원에서 더 막강한 책임과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세계 경제력 10위일 뿐 아니라 높은 소프트파워를 가진 국가로서 책임과 리더십의 외교를 펼쳐 나갔으면 한다. 현장 외교관들 말을 들어보면 수많은 나라들이 한국을 닮아야 될 나라로 보고 일본·독일·영국 같은 선진국보다 훨씬 더 큰 호감을 느낀다. 방탄소년단(BTS) 등으로 대변되는 문화파워뿐 아니라 자기들처럼 식민지·전쟁·가난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처지를 이해해줄 나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좋은 의미로 활용해 리더십을 발휘하고 지원에 나서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공백을 어떻게 채울 것이냐가 향후 5년, 10년 한국 외교의 본격적인 과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윤영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는 노무현 정부 초대 외교통상부 장관(2003~2004)을 지냈다. <외교의 시대: 한반도의 길을 묻다>(2015), <21세기 한국정치경제모델>(1999) 등 저서를 통해 한국 외교 방향에 대한 제언을 이어왔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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