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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월드리포트] 중국 "백지 시위는 지방 정부 무능 · 외세 개입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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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중국 전역에서 확산했던 통제 반대 시위, 이른바 '백지 시위'에 대해 중국 정부 고위 당국자가 처음으로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동안 일부 외신을 통해 시진핑 주석 등의 발언이 간접적으로 전해진 적은 있지만, 공개 석상에서 고위 당국자가 백지 시위에 대해 언급한 것은 처음입니다. 오히려 중국 정부의 대변인 격인 외교부는 백지 시위 관련 외신 기자들의 질문에 "당신이 거론한 상황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시위 확산 자체를 부인하거나, "당신의 나라 목소리에나 관심을 두기 바란다"며 즉답을 피했습니다. 중국 관영 매체들이 백지 시위에 대해 일절 보도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중국 SNS에서조차 시위 소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프랑스 중국 대사 "중앙 정책에 역행하는 지방 정부 탓"



입장을 밝힌 고위 당국자는 루샤예 프랑스 주재 중국 대사입니다. 루 대사는 지난 7일 프랑스 외교기자협회 초청으로 만찬 교류회에 참석해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습니다. 중국은 특히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일률적인 메시지를 강조해 온 데다 일국의 대사가 얘기한 것인 만큼, 루 대사의 입장을 중국 정부의 입장으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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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외교기자협회 만찬 교류회에 참석한 루샤예 주프랑스 중국 대사(왼쪽). (출처=주프랑스 중국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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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문일답에선 중국의 백지 시위와 시위에서 등장한 '민감한 정치적 구호'에 대한 질의가 가장 먼저 쏟아졌습니다. 민감한 정치적 구호란 그동안 중국에서 금기시됐던 시진핑 주석과 중국 공산당의 퇴진을 요구한 것을 말합니다. 이에 루 대사는 중국은 고강도 방역 정책, 즉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400만 명이 넘는 중국인의 생명을 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제로 코로나 정책을 펴지 않았다면 14억 중국인 중 수억 명이 코로나19에 감염돼 400만~500만 명이 숨졌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오미크론 변이의 치명률이 낮아지면서 중국 중앙 정부는 선제적으로 지난 11월 11일 20가지의 방역 완화 정책을 내놓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지방 정부들이 중앙 정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지방 정부들이 갑자기 코로나19 감염자가 늘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다가(手足無措) 다시 낡은 방법으로 돌아가 국민들의 불만을 샀다는 게 루 대사의 설명입니다. "중앙 정부는 방역을 완화하려 하는데 왜 지방 정부 당신들은 거꾸로 강화하느냐"는 불만이 이번 시위의 진짜 원인이라고 루 대사는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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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중국 전역에서 발생한 백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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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시위 배후에 외국 세력…색깔 혁명 냄새 나"



루샤예 대사는 외세 개입설도 주장했습니다. 백지 시위의 배후에 외국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지방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외부 세력이 포착하고 이를 기회 삼아 정치적 조작을 했다는 게 루 대사의 논리입니다. 외부 세력이 누구냐는 질문에 밝힐 수 없다면서도 외부에 있는 반중 세력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 근거가 있다. 일부 중국인은 외부 세력에 매수됐다"면서 이번 백지 시위에서 최근 개발 도상국에서 빈번하게 발생한 '색깔 혁명'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강변했습니다. 색깔 혁명은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조지아의 '장미 혁명', 이란의 '녹색 혁명' 등 2000년대 들어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독립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는 '백지 시위'의 흰색도 하나의 색깔이라고 했습니다.

루 대사는 이번 백지 시위를 1989년 톈안먼 사태와 연결 짓는 것 역시 외세 개입의 한 근거라고 봤습니다. 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데도 누군가가 고의로 둘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취지입니다. 루 대사는 첫날 발생한 시위만이 '진정한 시위(중앙 정부 정책에 역행하는 지방 정부에 대한 반발 시위)'이며 둘째 날 시위부터는 외세가 개입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외세가 누구인가? 미국과 관련된 세력인가? 국가인가 기업인가? 외부에서 온 중국 반대파인가?'라는 거듭된 질문에 루 대사는 "국가도 있고 조직도 있다"고 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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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프랑스 중국대사관은 루샤예 대사와 프랑스 외교기자협회의 일문일답 전문을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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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무치 화재가 발단…"3년간 좌절" 시진핑 발언과도 배치



'외세 개입설'은 중국이 반정부 시위가 발생할 때마다 활용하는 논리입니다. 신장위구르자치구 등에서 발생한 분리·독립 운동에도, 홍콩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도 중국 정부와 공산당은 외세 개입을 들고 나왔습니다. 정상적인 국민은 시위를 할 리 없다는 겁니다. 백지 시위가 처음 발생한 직후인 지난달 28일 중국 공산당 중앙정법위원회는 "적대 세력의 침투와 파괴 활동 등을 결연히 단속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백지 시위를 직접 거론하진 않았지만 백지 시위의 배후로 외세를 지목했음이 자명합니다. 중앙정법위원회는 공안과 정보, 사법 기관을 총괄하는 기구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국 정부의 입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얻을지는 의문입니다. 이번 백지 시위의 직접적인 발단은 지난달 24일 신장 우루무치에서 발생한 고층 아파트 화재였습니다. 당시 10명이 숨지고 9명이 부상했는데, 봉쇄 때문에 화재 진화가 지연됐다는 의혹이 확산했습니다. 우루무치 화재 희생자에 대한 추모 집회가 여기저기에서 열렸고 이것이 백지 시위로 확산했습니다. 3년 가까이 지속된 숨막히는 '제로 코로나' 정책에 대한 피로와 불만이 한꺼번에 표출된 것입니다. 지방 정부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중앙 정부와 공산당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시진핑 주석 퇴진', '공산당 퇴진' 구호가 나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백지 시위'란 이름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에 백지를 들고 나온 데서 붙여졌습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당국의 검열에 저항하고 투명한 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의미로,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A4 용지를 들었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우주의 팽창 속도를 측정하는 '프리드먼 방정식'이 적힌 종이를 들기도 했습니다. 민심 이반 속도가 우주의 팽창 속도와 같을 것이란 의미가 담겼다거나, 아니면 '프리드먼'의 발음이 '자유로운 사람'과 비슷해 이를 표현한 것이라는 등 해석이 분분했습니다. 어찌 됐든, 중국 정부가 언급한, 해당 국가나 야당의 색깔을 상징했던 '색깔 혁명'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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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먼 방정식'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중국 시위대(왼쪽)와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당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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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백지 시위를 지방 정부의 무능과 외세 개입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간접적으로 공개된 시진핑 주석의 발언과도 맞지 않습니다. 앞서 시 주석은 지난 1일 베이징에서 샤를 미셸 유럽연합 상임의장과 회담했는데, AFP 통신 등은 유럽 관리를 인용해 시 주석의 당시 발언을 전했습니다. 백지 시위에 대해 시 주석이 "시위 참가자들은 대부분 대학생이나 10대들"이라며 "코로나19가 3년 가까이 확산하면서 중국인들이 좌절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시 주석이 실제 이렇게 말했는지는 확인이 안 됩니다. 중국 정부나 매체는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만 놓고 보면, 백지 시위의 원인이 '중앙 정부 정책에 역행하는 지방 정부 때문'이라거나 '외세가 개입했기 때문'이란 뉘앙스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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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시진핑 주석과 샤를 미셸 유럽연합 상임의장의 회동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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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시위 이후 중국 정부가 방역 정책을 '제로 코로나'에서 '위드 코로나'로 급선회하면서 백지 시위는 잦아든 상태입니다. 이제는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에 따른 혼선과 불안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중국 정부의 백지 시위 원인 진단이 올바른지는 따져 봐야 합니다. 잘못된 진단은 잘못된 대처를 낳을 것이고, 이는 필연코 다시 저항에 봉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지성 기자(jisu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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