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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김도훈의 어텐션] 루이비통과 감자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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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이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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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여인’(1990)을 좋아한다. 콜걸과 백만장자의 사랑을 다룬 로맨틱 코미디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확실히 이 영화는 지난 시대의 산물이 아니었나 싶다. 성매매를 소재로 한 디즈니의 로맨틱 코미디라니. 지금 디즈니라면 기획 단계에서 시나리오를 불살랐을 것이다.

그래도 ‘귀여운 여인’을 좋아한다.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지나치게 대담한 구석은 있지만 어쨌거나 여기에는 줄리아 로버츠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하나다.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이라면 줄리아 로버츠의 영화를 전혀 보지 않았을 리는 없다. 적어도 ‘귀여운 여인’과 ‘노팅 힐’ 중 한 편은 봤을 것이다.

‘귀여운 여인’에는 상징적인 장면이 몇 있다. 가장 좋아하는 건 ‘명품 가게 복수’ 장면이다. 비비언(줄리아 로버츠)은 저속한 옷차림 때문에 할리우드 로데오 거리 명품 가게에서 쫓겨난다. 다음 날 그는 백만장자가 준 돈으로 명품을 빼입고는 전날 가게로 간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점원 앞에 쇼핑백을 흔들며 외친다. “큰 실수를 했네요!”

사람들이 여전히 이 장면을 기억하고 통쾌해하는 이유가 있다. 옷차림을 비롯한 외모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엿먹이기라서다. 지금 콜걸과 백만장자의 성매매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억지로 반자본주의적 메시지를 읽어내고 있는 거냐고? 아니다. 나는 그보다는 이 장면이 일종의 ‘소망 충족’이어서 여전히 기억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명품 가게에서 움찔한 경험이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명품 가게에 들어갈 때면 약간 자아가 움츠러든다. 내 옷차림이 충분히 구매 가능성 있는 손님으로 보일까? 지금 내 태도가 명품 가게에 처음 들어온 초보자로 보이지 않을까? 나는 뻣뻣해진다. 점원이 다가온다. 더욱 뻣뻣해진다. 땀을 흘리며 매장에서 나온다. 언젠가는 이 매장을 굴복(?)시키는 사람이 되리라는 소망을 품고서.

지난주는 이승기가 연예기획사 후크 엔터테인먼트와 음원 정산으로 갈등을 빚는다는 뉴스로 가득했다. 그 과정에서 후크 대표의 갑질에 대한 희한한 폭로가 쏟아져 나왔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대표가 루이비통 매장에서 감자탕을 시켜 먹었다는 주장을 담은 ‘조선일보’ 기사였다. 나는 박수를 쳤다. 명확하게 ‘귀여운 여인’ 명품 가게 장면에 대한 한국적 대구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종의 소망 충족이었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벌면 나를 업신여기는 이 반짝거리는 명품 가게를 굴복시키리라는 소망을 넘어선, 수백만 원짜리 옷에 둘러싸여 감자탕을 시켜 먹으리라는 아주 구체적인 소망 충족 말이다. 때로 현실은 영화를 보다 더 비틀린 방식으로 재현하곤 한다. 아니다. 나는 그 ‘주장’이 실제 인물의 실제 행동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귀여운 여인’을 1990년에 태어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서다. 맙소사, 생각해 보니 그들도 벌써 서른세 살이다.

조선일보

김도훈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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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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