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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양해원의 말글 탐험] [182] 눈도장은 누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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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번쩍할 만도 하다. 대통령·법무장관이 변호사 수십 명과 한밤 음주 가무를 즐겼다니. 국회의원이 국정감사장에서 캐물은 이 얘기가 거짓말이었음이 뒤에 드러났다. 이쯤 됐으면 죄송하다거나 면목 없다 할 법하건만, 아니었다. 당사자도 아니고 기자들한테 문자 보내기를, 관련된 분들한테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나.

혹시 ‘유감(遺憾)’이 미안하다거나 사과한다는 뜻으로 바뀌었느냐면, 아니었다.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표준국어대사전) 그럼 술자리가 사실이 아니어서 되레 자기가 못마땅하다 한 꼴이다. ‘관련된 분들’이나 할 소리니 적반하장(賊反荷杖) 아닌가. 이런 주객전도(主客顚倒), 워낙 그렇고 그런 정치판에나 있으면 그나마 나을 텐데….

‘환상적 헤더 두 골로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월드컵 축구 가나전에서 맹활약한 조규성 선수 기사 일부다. 한데 눈도장 찍은 사람이 조규성이라고? 도장은 뭔가 증명하거나 인정할 때 쓰는 물건. 홍길동의 고교 학업 성적이 좋으면 교장 도장 찍어 상장을 준다. 운전면허 시험에 붙으면 지방경찰청장 직인(職印) 담은 면허증이 나오고. 모두 인정하거나 증명해줄 권한이나 자격이 있는 쪽이 쓴다. 대상자인 홍길동이 자기 도장 찍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눈도장도 당연히 그렇다. 조규성이 멋진 축구 선수라 여긴 팬들이 찍어주는 것이지 어떻게 선수가 찍나. 그러니 ‘팬들에게 눈도장 받은 조규성’이라거나 ‘팬들이 눈도장 찍은 조규성’이 맞는 표현이다. 기업인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런저런 사업을 맡고자 요인(要人)을 만났다는 기사 제목을 보자. ‘재계 총수들이 사우디 왕세자에 눈도장 찍는 이유.’ 여기서도, 당신네한테 우리 사업 맡기겠소 하고 인정해줄 쪽은 사우디이므로 ‘왕세자에게 눈도장 받는’이 옳다.

소는 몰아야 가고 말은 끌어야 간다던가. 모든 일이 이치에 맞아야 할 터, 언론만큼은 익은 밥 먹고 선소리하지도, 도장 함부로 찍지도 말자. 잘못하다 큰일 난다.

[양해원 글지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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