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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4] 잎이 지면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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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성수, tree_study 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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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천천히 가을이 지나갔다. 긴 가을날들 동안 나무는 초록을 단풍으로 바꾸었고 이내 낙엽을 내렸다. 올해엔 유난히 오래 가을을 누렸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눈이 오는 차가운 길을 지키고 선 앙상한 가로수는 햇살이 비쳐도 쓸쓸해 보인다. 다음 봄이면 다시 물이 올라 생기 넘치는 잎을 틔울 날이 올 줄 알지만, 초겨울의 스산함은 눈에서 마음으로 찬 기운을 퍼뜨린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감정이입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인생의 사계절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어느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새로운 일을 겪을수록 역동적인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매해 반복되는 겨울을 수십 번 맞이했더라도 이번 겨울이 다시 새로울 수 있는 이유는 계절의 중심엔 언제나 나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김성수 작가는 ‘트리 스터디(2008)’ 연작에서 겨울의 앙상한 나무를 완전히 다르게 바라보았다. 그는 아름다운 정원에 잘 가꾸어진 정원수들을 찍는 수많은 방법 중에서 가장 낯선 시선을 끌어냈다.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길게 늘어선 대형이 강조되도록 원근법을 잘 살리거나 한 그루 한 그루의 아름다움이나 위용이 드러나도록 빛을 이용하는 일반적인 접근법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작가는 그저 잎이 모두 지고 난 겨울 나무와 담백하고 정직한 정면 승부를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프랑스에서 춥고 배고픈 유학 생활을 하던 중에 만들어졌다. 창작에 대한 순수한 욕망과 현실에 대한 처절한 두려움이 젊은 예술가를 얼마나 강렬하게 지배하고 있었는지를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나뭇잎 한 장 남지 않아 앙상하게 빈 가지들을 이렇게 역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작가의 눈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차가운 밑동을 쓸어안을 듯이 다가서서 바짝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고개로 김성수가 찾아낸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그림이며 다시 돌아올 생명이었다.

차가운 날씨가 머리를 맑게 한다. 미국의 유명 강연자 짐 론은 겨울을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시기라고 했다. 모든 성공 스토리의 시작은 실패와 좌절이듯이, 겨울은 끝이 아니다. 가려진 것들을 들춰서 가감 없이 바라보며 봄을 준비하고 부르는 시간이다.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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