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1909년 하얼빈의 총성… 안중근도 관객도 숨을 죽였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영화 리뷰] 영웅

이토 히로부미 저격한 영웅 실화

‘국제시장’ 윤제균 8년만의 복귀작

조선일보

뮤지컬 영화 ‘영웅’에 나오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의거 장면. 환영 인파에서 빠져나온 안중근(정성화)이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CJ EN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1909년 2월 러시아의 눈 덮인 자작나무 숲. 안중근(정성화)과 독립군들은 조국을 위해 싸우자 맹세하며 단지(斷指)를 한다. 그 피를 모아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고 태극기에 쓴다. “우리의 함성이 잠자는 숲을 깨우듯/ 어두운 이 세상 깨우리/ 잊지 말자 오늘~”

영화 ‘국제시장’(2014)으로 1426만 관객을 모은 윤제균 감독이 8년 만에 돌아왔다. 뮤지컬 영화 ‘영웅’은 이 합창 ‘그날을 기약하며’로 열린다. 원작은 2009년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맞아 LG아트센터에서 초연한 뮤지컬 ‘영웅’. 윤 감독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이 거사를 도모하던 때부터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마지막 1년을 스크린에 담았다.

조선일보

뮤지컬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과 독립군들이 단지동맹 후 '그날을 기약하며'를 부르는 장면 /CJ EN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노래와 이야기, 골격은 그대로되 거죽은 다르다. 뮤지컬이 보여줄 수 없는 근경과 원경, 뒷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진다. 어머니 조마리아(나문희)와 가족들을 남겨둔 채 고향을 떠나온 대한제국 의병대장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덕순(조재윤), 조도선(배정남), 유동하(이현우), 마진주(박진주)와 함께 거사를 준비한다. 한때 명성황후를 모시던 궁녀 설희(김고은)는 정체를 숨긴 채 이토 히로부미에게 접근해 ‘그가 곧 하얼빈을 찾는다’는 첩보를 독립군에게 전한다. 어둠과 눈발을 뚫고 달려오는 기차에 표적이 타고 있는 것이다.

독립군들은 일본 경찰들에게 쫓기며 동지들을 잃어간다. 추격 장면은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지만, 만두가게에서 부르는 노래 ‘배고픈 청춘’은 희극적 쉼표와 같다. 윤제균답게 유머 코드는 다소 유치하다. 그러나 모두가 결말을 아는 이 비극의 하중을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동지의 장례식을 치른 성당에서 안중근이 “조국이 대체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혼잣말을 할 땐 영웅이 아닌 고뇌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조선일보

뮤지컬 영화 '영웅'에서 독립군 정보원 설희(김고은). 배우 김고은도 탄탄한 노래 실력을 보여준다. /CJ EN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마침내 하얼빈역에 기차가 도착한다. 스물여덟 살 청년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는 환영 인파에서 빠져나와 권총을 겨눈다. 탕탕탕. 이토가 쓰러지는 대목에서 시간은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하지만 “대한제국 만세!”가 들리기 무섭게 법정 장면이 돌진해온다.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이유를 당당히 밝힐 땐 ‘누가 죄인인가’라는 합창이 메아리친다. 조마리아는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 보내며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그냥 죽으라”는 편지를 쓴다. 장담하는데 이때 부르는 어머니의 노래가 눈물샘을 건드릴 것이다.

이 영화는 연말에 유일한 국산 블록버스터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2′와 1주일 간격을 두고 21일 개봉하는 정면 승부를 선택했다. 113년 전 블라디보스토크를 재현하기 위해 라트비아에서 촬영했고 하얼빈은 합천과 평창의 세트에서 재현한 뒤 시각특수효과(VFX)로 구현했다. 노래는 대부분 라이브로 녹음했다. 뮤지컬 무대를 평정한 배우 정성화의 가창력과 연기력은 물론 화면을 가득 채우는 안중근의 클로즈업을 만날 수 있다.

조선일보

뮤지컬 영화 '영웅'의 안중근(정성화)과 조마리아(나문희) /CJ EN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영웅’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다. 나라 잃은 삶이 어떤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데 이 영화는 그 비극을 간접 체험하게 해준다. 몇몇 장면에선 심장이 고동칠 것이다. 2014년 세월호 사건 직후 ‘명량’과 이순신이 국민적 무력감을 파고들었듯이, 이태원 참사를 겪고 영웅이 그리워지는 시기라는 점은 흥행에 도움이 될 전망이다. 다만 일반 관객이 뮤지컬 영화의 이질감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안중근의 목에 밧줄이 걸리는 마지막 순간, 관객도 숨을 멈춘다. 죽음을 초월하는 이 장면에서 안중근이 부르는 명곡 ‘장부가(丈夫歌)’는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 하늘에 대고 맹세해본다~”로 흘러간다. 영화가 끝나도 귓바퀴에 맴돌며 망각을 깨우는 멜로디다. 안중근의 유해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미래를 바꿔줄 영웅을 기다리면서 정작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영웅은 잊고 있었다.

조선일보

뮤지컬 영화 '영웅'의 법정 장면. 합창 '누가 죄인인가'가 울려 퍼진다. /CJ EN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박돈규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