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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이태원 참사 한달… 본질은 흐려지고 책임전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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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지 한달 가까이 지난 2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들머리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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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권태영 | 중앙대 적십자간호대학 간호학과 1학년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다. 한국사를 가르치던 선생님께서 근대사 수업 중 질문을 던지셨다. ‘너희들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무엇이니? 나는 아이엠에프(IMF)가 생각나. 그땐 정말 모두가 힘들었거든.’

우리 모두가 답했다. “세월호요.”

선생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2016년의 여름,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막 지난 시점이었다. 왜 어른들은 바로 세월호를 떠올리지 못했을까. 애도의 장이 채 걷히기도 전 지저분한 싸움터로 변질된 사건이었기 때문일까.

10·29 이태원 참사 뒤 한달이 흘렀다. 많은 이들의 눈물과 위로로 점철된 기간이었다. 처음 한주는 이태원의 그 날과 직접적인 연관 없는 이들조차도 숙연하고도 조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 캠퍼스에서도 해외유학생 희생자를 위한 헌화장소가 마련됐으며, 평소 이-아이디(e-id)를 통해 출석을 확인하던 교수님들도 혹시 모를 결석자를 파악하기 위해 학생들 이름을 직접 호명하며 출결을 확인했다.

에브리타임을 비롯한 각종 커뮤니티에는 온갖 애도와 위로의 글들, 현장에서 빠져나온 이들의 살떨리는 경험담과 당시의 끔찍했던 분위기를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뉴스와 토막글들이 뒤섞여 유입됐다. 에스엔에스(SNS)와 커뮤니티에서 날 것 그대로의 사진과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 혼란스러워하던 이들도 있었다. 잠시나마 우리는 그 날의 물결 속에 잔잔하게, 그렇지만 깊숙이 휩쓸리고 있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마음속에 이태원은 빠르게 사라져 갔고, 이제 일상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 모두 일종의 금기라도 된 것처럼 이태원 참사를 언급하지 않는다. 자주 이용하는 커뮤니티에서도 이제 ‘이태원’이란 단어만 보여도 시사게시판 정도에서나 격하게 반응할 뿐, 그 외에는 정치적인 냄새를 풍긴다며 꺼리는 분위기다. 그들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정치판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사건의 본질은 흐려지고 의미없는 명분과 책임전가를 위한 싸움판이 벌어진다는 것을. 8년 전 세월호 참사가 그랬듯이.

그렇지만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서는 아직 이태원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애도와 명복의 분위기가 사라진 인터넷에는 ‘압수수색', ‘국회 통과', ‘소방서장 재소환’과 같은 단어들과 정치색 짙은 기사글만이 난무 한다.

최근 유튜브에서 본 일본 방송의 한 대목. 이태원 참사를 스튜디오에서 모형으로 재현하면서, 10도 경사로가 좁은 공간에 몰린 이들에게 얼마나 심한 압박감을 줬는지 등 분석이 이뤄졌다. 마네킹 더미 사이에서 사건을 설명하는 일본 캐스터를 보면서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왜 저들이 하는 걸까? 한국에서는 대형 참사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조처를 하는 과정은 보여주지 않고, 많은 인파가 몰리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알려주려 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죗값을 대신 치러줄 희생양을 고르는 대국민 사냥쇼를 보는 것만 같다.

이태원 참사는 온전한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으로만 남아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한명의 시민으로서 10월 말 어느 날, 골목길을 뒤덮었던 한 비극의 막이 벌써 내려가지 않기를, 세월호가 그러했듯이 참극의 본질을 가리는 기사와 보도 대신 피해를 입지도 않은 이들의 기싸움으로 오염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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