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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우리들의 문화재 이야기

[충북 장인열전] 돌에 생명 불어넣는 신명식 자석벼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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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색 벼루 황금기 이끌며 1973∼1992년 대통령 하사품 제작

4년 전 은퇴해 가업 승계한 아들 지원 "옛 영화 되찾기 기대"

[※ 편집자 주 = 자고 나면 첨단제품이 쏟아지는 요즘이지만, 옛 방식을 고집스럽게 지키면서 전통의 맥을 잇는 장인들도 있습니다. 비록 이들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지 않더라도 조상의 혼이 밴 전통문화를 후대에 전수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들이 선보이는 전통문화의 가치와 어려운 여건에도 꿋꿋하게 외길을 걷는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사회적 관심과 예우 분위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충북 장인열전'을 매주 금요일 송고합니다.]

연합뉴스

자석벼루 제작 시연하는 신명식 장인
권정상 촬영



(단양=연합뉴스) 권정상 기자 = 세 평 남짓한 그의 공방에는 뽀얀 돌가루가 켜켜이 쌓여 있다.

이곳에서 돌을 깎고, 다듬고, 광을 내기를 반백년. 허름한 공방 바닥을 뒤덮고 벽에까지 엉겨 붙은 돌가루는 그 세월의 더께이기도 하다.

산골짜기 한쪽에 나뒹굴던 그저 그런 검붉은 돌덩이는 그의 손길에 제 몸이 깎이고 갈리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한다.

문방사우(文房四友). 붓, 종이, 먹과 더불어 선비의 네 벗 중 하나인 벼루다.

충북 무형문화재 18호인 자석(紫石) 벼루장 신명식(70) 씨의 손끝에서는 그렇게 수만개의 자석벼루가 생명을 얻었다.

저마다 연꽃, 소나무, 대나무, 매화, 난, 국화, 용, 봉황, 학, 거북 문양으로 한껏 치장하고 세상으로 나갔다.

단양군 영춘면 하리의 단양강(남한강의 현지 명칭) 변에 자리 잡은 그의 공방에서 생산되는 자석벼루는 자주색을 띠는 데다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을 지녀 서예인 사이에 인기가 높다.

물이 잘 스며들지 않고 먹이 곱게 갈리는 것도 자랑이다.

인근 가곡면 향산리 산속 계곡에서 채취하는 자석은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아 벼루를 만드는 데 최적의 재료로 꼽힌다.

좋은 원석이 이곳에 존재함으로써 신 씨에 의해 자석벼루가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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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연지문연, 십장생문연, 운용문연, 매화문연
권정상 촬영



그는 까만 오석으로 만드는 남포벼루의 고장인 충남 보령 출신이다.

조부와 부친도 유명한 남포벼루장이었다.

부친이 일제 강점기 징용당해 영춘면에서 자석벼루를 만들다가 해방 뒤 집에 돌아와 자석의 존재를 언급한 게 그가 벼루 인생을 사는 계기가 됐다.

6남 1녀의 막내인 그는 중학교 졸업 후 공무원이 되고자 했다.

출생 신고가 잘못되는 바람에 바로 위 형 이름으로 체신청 전신원 실기시험에 합격했지만 이게 문제가 될까 싶어 결국 면접을 포기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깨너머로 벼루 만드는 기술을 체득한 그는 부친을 돕다가 따로 독립해 납석(곱돌) 공예를 하는 셋째 형 근식(80·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6호 벼루장) 씨를 보기 위해 영춘면에 왔다.

부친이 했던 얘기를 기억한 형제는 촌로들의 도움을 받아 사흘간 일대 산을 뒤진 끝에 자석 광산을 찾아내 광업권을 확보했다.

이게 1972년의 일이다.

형의 일을 도우며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요량이던 그는 납석 공예품을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생각을 바꿨다.

그해 8월 한반도를 덮친 태풍 '베티'로 인해 납석 공예품 공장이 침수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새로 지은 단층 건물은 영춘 자석벼루의 산실이 됐다.

당시 보기 드물었던 자주색 벼루는 금세 입소문을 탔다.

1973년에는 청와대로부터 자석벼루 36개를 납품하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년퇴직하는 교사들에게 선물할 하사품 용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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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석 고르는 신명식 장인
권정상 촬영



이후 한 해 두 차례씩 정기 납품이 노태우 대통령 재임기인 1992년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해에 납품한 물량은 1천890개에 달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일본에도 수출돼 1991년 수출액이 20만 달러에 달하기도 했다.

이때가 영춘 자석벼루의 황금기다.

형 근식 씨가 사업 확장을 위해 1980년대 초 경기도 성남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그는 '영춘벼루공예사'의 주인으로서 온전히 영춘 자석벼루의 기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 값싼 중국산이 유입되면서 자석벼루도 급속히 그 빛을 잃어갔다.

국내 수요가 잦아들고 일본 수출도 아예 끊겼다.

"중국산 벼루의 가격은 10분의 1 수준이었어요. 웬만큼 품질도 갖췄으니 상대적으로 비싼 자석벼루가 팔릴 리가 있나요. 30여명 직원을 모두 내보낼 수밖에 도리가 없었죠"

자석벼루 제작은 좋은 원석을 찾는 데서 시작한다.

광산에서 채취한 돌은 망치로 두드려 '쨍쨍' 맑은 소리를 내는 것을 골라낸다.

"내부에 실금이 있는 돌은 둔탁한 소리가 나요. 이런 돌로 벼루를 만들면 갈라지거나 먹물이 샙니다. 병든 돌을 쓰면 안 되는 거지요"

엄선한 원석은 재단-절단-평면 다듬기-바닥·물집 파기-조각의 과정을 거친다.

이어 가장 중요한 봉망 세우기 작업이 진행된다.

먹을 가는 부위인 봉망에 인위적으로 미세한 요철을 만드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밀랍으로 광을 내면 하나의 벼루가 완성된다.

이 과정에 사용되는 도구는 20여종.

박톱, 작두칼, 망치, 정, 평미레, 물집칼, 아로칼 등에 의해 쪼이고 갈려 나간 자석 원석은 저마다 우아하고 기품있는 모습으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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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 제작에 쓰이는 도구
권정상 촬영



그의 손길이 미치는 데 따라 용문연, 운용문연, 연지문연, 송죽매문연, 매화문연, 사군자문연, 십장생문연, 송학문연, 거북문연 등 다양한 이름을 얻는다.

이들 벼루는 1992년 제2 녹색지대 민속공예품 부문 품평회 대상, 1993년 제23회 전국 공예품 경진대회 장려상, 1999년 관광 공예품 공모전 최우수상 등 숱한 수상 경력을 그에게 안겼다.

2008년 충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그는 2016년 실기시험까지 거쳐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결정됐다가 국정농단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유야무야 됐다.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그는 당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더라면 자석벼루가 옛 영화를 되찾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됐을 것으로 판단한다.

4년 전 현업에서 은퇴한 그는 아들 재민(45) 씨의 보조역으로 물러나 있다.

간암 치료 과정에서 신장 기능이 망가져 정기적으로 투석 치료를 해야 하는 데다 오른쪽 눈이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그의 정성과 손때가 묻은 작품은 이제 겨우 20여점 남아있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한 달 이상 공들여 자연석으로 만든 연지문연과 십장생문연, 신선도문연은 소장용으로 전시장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평생을 자석벼루와 함께했습니다. 이제 더 바라는 것도 없어요. 아들이 가업을 이었으니 내 소명을 다 이룬 거죠. 아들이 나보다 더 잘합니다. 아들 대에 자석벼루가 사람들의 사랑을 되찾았으면 좋겠네요"

4대째 가업을 이어받은 재민 씨는 현재 전승교육사로서 자석벼루 제작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는 5년쯤 더 기술을 연마한 뒤 부친의 뒤를 이어 충북도 무형문화재 심사를 신청할 예정이라고 했다.

jus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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