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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일본해 병기’ 30년 외쳐온 우리가 먼저 실천할 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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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동해연구회 회장 주성재 교수

한겨레

동해연구회장 주성재 교수가 지난 9월 29일 경희대 연구실에서 동해-일본해 병기운동 30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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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병기운동 30년의 가장 큰 성과요? 이 문제를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됐다는 것이죠. 이제 지명 전문가와 지도 제작사들이 신경을 다 씁니다. 함부로 단독 표기 못하는 것이죠.”

한국이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동해 수역의 표기를 ‘일본해’가 아닌 ‘동해·일본해(east sea·sea of Japan)로 병기하자’는 운동을 시작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됐다. 이 운동을 주도해 온 동해연구회의 4대 회장인 주성재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는 국제적으로 동해 병기를 더 확산시키려면 “우리 주장이 ‘일본해 표기를 동해로 바꾸자’는 게 아니라 이를 함께 쓰자는 ‘병기’임을 한국 사회가 더 깊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경희대 교수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계기

1992년 지명표준화회의 ‘병기’ 제안

연구회, 운동 나서 국제사회 인식 바꿔

“병기 표기율 50% 가까이로 증가세”


2년전부터 지명 대신 디지털 번호로

“국외용 지도 제작 때 병기해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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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재 교수가 지난 9월29일 ‘동해 병기운동’ 30년의 성과를 이어가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국인들에게 너무 당연한 ‘동해’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겠다는 운동이 1992년에야 시작된 것은 분단과 냉전으로 이어지는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사정 때문이었다. 남북한의 동시 유엔 가입이 이뤄진 것은 대한민국이 건국되고도 40여년이 지난 1991년 9월이었다. 가입해보니 여러 유엔 기구들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각종 공문서에 동해 수역을 일본해로 단독 표기하고 있었다. 이 사실에 크게 놀란 외교부는 1992년 6월 문화부·교육부·공보처·교통부(수로국)·건설부(국립지리원) 등 관계 부처와 협의를 거쳐 7월 ‘동해 명칭의 국제적 통용추진 대책안 건의’라는 문서를 만들게 된다. 이를 통해 정부는 ‘일본해 표기를 동해로 바꾸자’는 게 아니라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자’는 원칙을 정하게 된다. 한국 정부가 국제 사회에 이 주장을 처음 내놓은 것은 1992년 8월 열린 제6차 유엔(UN) 지명표준화회의 때였다. 지금까지 30년에 이르는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한국의 병기 주장은 국제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산과 강과 바다를 어떻게 부를지는 그 사람의 정체성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다. 게다가 나의 역사와 정체성만 중요하다는 ‘동해 단독 표기’가 아닌 상대를 인정하고 공존을 추구하자는 ‘병기’였다. 세계 지명 전문가들이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효과는 느리지만 분명히 나타났다. 외교부가 재외공관을 통해 조사한 내용을 보면, 2000년엔 불과 2.8%에 불과했던 각종 세계 지도와 교과서의 병기율은 2009년 28.1%까지 늘었다. 이후 외교부는 정확한 수치를 공개하지 않지만, 최근 병기율은 40% 정도인 것으로 전해진다.

주 회장은 “이 운동을 통해 언제든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단단한 국제적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것도 큰 성과”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도 병기가 중요합니다. 언젠가 한 정부기관의 누리집에 ‘동해 병기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동해 단독 표기’라고 설명해놓은 적이 있습니다. 영국 지명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낸 폴 우드먼이 이메일을 보내와 묻더군요. ‘이게 진짜냐. 그렇다면 당신들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고요.”

2020년엔 중요한 변화가 이뤄졌다. 그동안 동해 병기운동의 ‘주전장’이 되어 왔던 국제수로기구(IHO)의 1929년 에스(S)-23(해양과 바다의 경계)가 디지털 시대에 맞는 에스-130이란 새 표준으로 대체됐다. 이를 통해 에스-23에 따라 붙던 ‘홍해’나 ‘지중해’ 같은 지명이 사라지고 ‘고유식별번호’(숫자)가 만들어졌다. 일본해 단독 표기를 동해 병기로 바꾸진 못했지만, 장래 도입될 디지털 표준에선 일본해 등 바다의 명칭 자체를 없애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생각하면, 지난 30년은 동해 병기 뿐 아니라 지명에 대한 인류의 인식이 확장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주 회장은 최근 지명과 관련한 “국제적 화두는 포용(inclusion)과 지명을 문화유산적 관점에서 보자는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선 ‘블랙 라이브스 매터’(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중요해 지면서 인종차별적인 의미가 있는 지명들을 배제하는 움직임이 진행 중입니다. 또 유엔에선 그보다 훨씬 전인 2002년께부터 지명을 문화유산적 관점에서 보려는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북유럽 국가들이 북극권에서 살아온 사미족들이 쓰는 지명이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원주민들의 지명을 지키려 하는 것이죠.” 이런 흐름에 따라 알래스카 최고봉인 매킨리의 이름은 2015년 원주민 명칭인 ‘디날리’로 바뀌었다. 세계의 배꼽이라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에이어스 락’은 1993년 원주민 언어인 ‘울루루’(위대한 돌)로 병기되고 있다. 뉴질랜드에선 국명 자체를 마오리어를 따 ‘아오테아로아’(흰 구름의 땅)로 부르자는 움직임이 진행 중이다.

또다른 중요한 변화는 디지털 시대의 지명이다. 세계인들이 종이 지도가 아닌 ‘구글’ 지도를 주로 이용하게 되면서 많은 게 변했다. “디지털을 통해 여러 지명을 수용할 수 있게 됐고(다양성), 스케일(축척)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유연성). 한국에서 동해 수역을 검색하면 동해, 일본에서 검색하면 니혼카이(日本海) 라고 나옵니다. 제3국에서 찾으면 ‘시 오브 재팬’이 먼저 나오고 여러 번 줌인을 해야 ‘이스트 시’가 나옵니다. 우리 주장은 이 둘을 동등한 수준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 회장은 “구글 지도 담당자도 한국의 주장을 잘 알고 있지만,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려면 구글 차원의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해 병기 문제를 궁극적으로 풀려면, 일본과 공감대를 넓혀야 한다. 주 회장은 이를 위해 “한국이 해온 병기 제안을 실천해 보면 어떨까 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내놓았다. “한국어 지도는 당연히 동해죠. 하지만,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영어 등 외국어로 제작하는 지도에 병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국제 사회는 동해 명칭 확산을 위해 한국이 취한 성숙한 태도로 받아들일 겁니다. 우린 화해와 해결을 지향해야 합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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