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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역도산 제자' 日 레슬링 대부 이노키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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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안토니오 이노키가 2014년 7월 방북해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일본 프로레슬링 대부인 안토니오 이노키(본명 이노키 간지·사진)가 1일 오전 심부전으로 별세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향년 79세.

1943년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난 이노키는 5세 때 아버지를 잃고 2차 세계대전으로 가업이 도산한 이후 브라질로 이주했다. 1960년 원정을 위해 브라질을 방문한 역도산(본명 김신락)에게 스카우트돼 17세였던 그해 일본 프로레슬링계에 뛰어들었다.

북한 출신으로 일본의 국민 영웅이었던 역도산과 그의 3대 제자로 꼽히는 이노키, 김일, 자이언트 바바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순수 일본인이었던 그는 일본계 브라질인이라는 콘셉트로 프로레슬링에 데뷔했다. 1962년부터 링네임으로 쓰기 시작한 안토니오 이노키 역시 브라질인 이미지를 위해 붙여졌다.

이노키의 1960년 프로레슬링 데뷔전 상대는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이었다. 데뷔전에서는 김일에게 패했으나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여러 차례 김일과 명승부를 펼치면서 한국 국민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노키는 말년에 투병 중인 김일을 문병하는가 하면 경기 광주 '나눔의집' 위안부 할머니를 위로 방문하는 등 국내 팬들에게 '의리 있는 사나이'로 자리 잡았다.

이노키는 특유의 쇼맨십으로 흥행 보증수표 역할을 했다. 1976년 도쿄에서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 벌인 '세기의 대결'은 14억명이 TV로 지켜봤다. 이노키는 시종일관 누워서 알리의 다리에 킥을 시도했고, 알리는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만 해 '세기의 졸전'이 됐다. 알리가 "누워서 돈 버는 놈은 창녀와 이노키밖에 없다"고 하자 이노키는 "누워 있는 창녀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놈"이라고 응수했다. 이노키는 훗날 로프터치나 그래플링(상대를 잡아 던지는 것), 허리 위 타격 등이 금지돼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다고 토로했다. 압도적으로 유명한 알리 쪽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노키는 정치가로서도 성공했다. 그는 1989년 스포츠평화당을 만들어 같은 해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당선됐다. 1990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에 인질로 잡혀 있던 일본인들을 석방하는 데도 기여했다. 1995년 선거에서 낙선했고, 1998년에는 레슬링과 정치에서 모두 은퇴했다. 이후 2013년 정계에 복귀해 참의원에서 재선됐다.

이노키의 유행어는 "겡키데스카!(건강합니까)"였다. 정계 진출 후 국회 발언 때도 이 말부터 시작했다. 큰 목소리로 갑자기 외쳐 의원과 각료들을 깜짝 놀라게 한 뒤 "원기가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 "원기가 있으면 질문도 할 수 있다"고 반복한다. 그의 선거구호에는 "국회에 만지가타메!" "소비세에 엔즈이기리!" 등 주로 레슬링 용어가 동원됐다.

이노키는 자신의 스승인 역도산이 북한 출신이라는 배경 등을 이유로 북한을 자주 방문해 고위층과 회담하는 등 북·일 관계 개선에도 의욕을 보였다. 1995년 4월 그가 북한에서 처음으로 프로레슬링 행사를 열었을 때 이틀 동안 38만명이 관람하며 높은 인기를 자랑했다. 참의원 의원이던 2013년 11월에는 스포츠 교류 행사 참석차 북한을 방문해 김영일 노동당 비서와 회담하고 북·일 관계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연속 방북해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고 일본 방송 NHK는 전했다.

[신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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