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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여장부 은정은 왜 사장님 출장을 따라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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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문학상 9월의 소설을 추천합니다]

[2] 이주혜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가 9월의 소설을 추천합니다. 이달 독회의 추천작은 2권. ‘여름과 루비’(박연준),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이주혜)입니다. 심사평 전문은 chosun.com에 싣습니다.

소설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에 수록된 이주혜의 소설들은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차분하면서도 격렬한 시선들로 가득하다. 여성의 삶을 짓누르는 가부장제의 그림자, 출산을 앞두고 찾아든 모성에 대한 회의, 코로나 시대에 기저 질환이 있는 아이를 돌보는 양육의 문제, 9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의 후일담 등등 우리시대 여성들의 삶에 드리워진 여러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다.

조선일보

소설가 이주혜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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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의 주인공 구은정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목재회사에 취직해서 가족을 부양했다. 큰 키와 커다란 덩치를 가진 탓에 거인, 여장부, 처녀장사와 같은 별명으로 불렸다. 놀랍게도 그녀는 사장의 일본 출장 수행원으로 발탁되었고, 그 덕분에 직장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장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숙덕거림을 견디며 지내야 했다. 은정이 믿고 따랐던 소희 언니는 말한다. “우리 구은정 양, 다리 벌렸니?”(155쪽) 여성의 몸에 가해졌던 언어의 폭력들을 떠올리게 된 것은, 중년을 넘긴 은정이 자궁 적출 수술을 받게 되면서다. 생물학적 여성과 비(非)여성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말한다. 사장은 동성 연인 사토를 만나기 위해 일본 출장을 갔고, 은정을 이성애적 논란을 위한 계기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비밀을 지켜나갔다고. 은정에게도 비밀이 있다. 사장이 사토를 만나는 동안 은정은 카페의 여주인과 하룻밤 사랑을 나눈 바 있다. 그 카페의 고양이 이름이 구르미 라떼 아로니아 바로네즈 3세이다. 카페 이름, 털이 라떼처럼 부드러워서 붙여진 이름, 고양이를 구해준 사람의 이름, 애니메이션 ‘고양이의 보은’에서 가져온 이름들이 결합된 긴 이름. 은정의 몸에 각인된 언어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사장의 고민, 사토의 기다림, 사람들의 숙덕거림, 아버지의 목소리 등등 은정의 몸에 각인된 언어들이 자궁을 적출하는 동안 유령처럼 출몰한다. “자궁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137쪽)

소설을 읽으며, 여성의 몸에 드리워진 삶의 무게와 언어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간을 두고 다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동안 눈길이 소설의 여백에 머물러 있었다.

☞이주혜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자두’ 등을 썼고, ‘나의 진짜 아이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등 소설을 번역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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