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도시의 공터에서 시간을 걷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서울공예박물관 앞마당은 모두를 환대하는 열린 공터다. 사진 김종오 건축사진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그땐 그랬지. 여기저기 널린 게 빈 땅이었고, 빈 땅이면 다 놀이터였다. 김훈의 <공터에서>가 출간됐을 때 소설 내용과 상관없이 가슴이 얼마나 쿵쾅거렸는지 모른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단어, 공터를 다시 만난 것이다. 도시 곳곳에 방치되고 유기된 ‘지도 바깥의 땅’, 공터는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주택가에도, 등하굣길에도 공터가 수두룩했다.

아이들 키보다 높이 자란 잡초더미 공터도 있었고, 돌밭에 가까운 거친 공터도 있었다. 누군가는 메뚜기를 잡거나 잠자리채를 휘두르며 오후를 보냈고, 누군가는 땅거미 내려앉을 때까지 비석치기와 오징어 게임에 열중했다. 흙먼지 날리는 맨땅 학교 운동장도 공터의 추억에서 빼놓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땅 같았던 운동장, 친구들과 엉켜 뛰놀다 수돗가로 몰려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색하고 단아하게 디자인한 요즘 공원이나 광장보다 그 시절 공터들이 더 여유롭고 자유로웠다.

숨 쉴 틈 없이 고밀한 도심 한복판에 공터가 생겼다. 옛 풍문여고 건물 다섯 채를 리모델링해 2021년에 개관한 안국동의 ‘서울공예박물관’이다. 문을 열자마자 박물관 안마당은 장소 덕후들의 ‘인스타 성지’로 등극했다. 400년 수령의 장엄한 은행나무, 연실 감는 얼레처럼 테라코타 관을 둥글게 쌓아 올린 크레이프 케이크 형태의 건물 입면, 곡선형 콘크리트 틀로 유려하게 지형을 고른 경사 초지. 지극히 이질적인 세가지 요소를 한 프레임에 담으면 대충 찍어도 그림이 나온다. 사진 잘 나오는 매력적인 풍경일 뿐 아니라 고즈넉한 산책과 휴식도 담아내는 넉넉한 장소다.

한겨레

느릿하게 걷다 털썩 앉아 쉴 수 있는 서울공예박물관 안마당. 400년 수령의 은행나무는 장소의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사진 김종오 건축사진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공예박물관이 도시의 공터로서 갖는 힘은 감고당길과 안국역 쪽으로 담장 없이 열린 박물관 본관 앞마당에서 극대화된다. 느릿하게 걷다 털썩 앉아 눅눅한 머릿속을 바싹 말리기 좋은 이 마당 터에는 2017년까지 70년 넘게 풍문여자고등학교의 운동장이 자리했다. 켜켜이 쌓인 기억의 지층은 훨씬 더 두껍다. 풍문여고에 앞서 조선의 안동별궁이 있었던 터다.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거처로 쓰였고, 세종이 승하한 곳이자 문종의 즉위식이 열린 곳이며, 고종이 개축해 순종의 혼례를 성대하게 치른 축제의 장이기도 했다. 1950년대의 빛바랜 사진 한 장에는 근대식 교사에 옛 별궁 한옥들이 이어져 있고 그 앞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줄 맞춰 조회를 하는 초시간적 광경이 담겨 있다. 설계공모 당선 이후 공예박물관 건축을 이끈 송하엽(중앙대 교수)의 말처럼, 이 “시간을 걷는 공간”은 “도시에 고고학적 깊이”를 더한다.

시간의 흔적과 기억의 지층 못지않게 공예박물관 마당의 강한 장소성을 만들어내는 힘은 도시를 향해 열린 빈 땅 그 자체에 있다. 전시회를 관람하러 오는 사람보다 목적 없이 그냥 들고 나는 사람이 훨씬 많다. 모처럼 도심 산책을 즐기다가, 즐거운 퇴근 걸음으로 안국역을 향하다가 뻥 뚫린 공간을 만나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들어서는 사람들. 조경 설계로 부지의 잠재력을 한층 끌어올린 박윤진과 김정윤(오피스박김 소장)은 “풍문여고 운동장 자체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하이힐을 신고도 편히 다닐 수 있는 흙 포장을 구현”했으며 “학교 담장을 걷어내 부지를 여는 게 곧 설계의 핵심”이었다고 말한다. 풍문여고 담장을 허는 과정에서 발굴된 안동별궁 담장의 기단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노출 전시됐다. 텅 빈 공간 가장자리의 매화나무 숲과 나지막한 둔덕이 공터에 안온한 공간감을 준다. 모두에게 열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도심 공터의 매력, 안국역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바로 실감할 수 있다.

박물관 교육동 옥상의 전망대에 올라가면 이 장소의 도시적 잠재력을 한눈에 간파할 수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인사동과 북촌 사이에 자리한 공예박물관 바로 맞은편에는 또 다른 공터가 있다. 오랫동안 방치된 송현동 숲이다. ‘이건희 미술관’이 들어설 송현동의 등 뒤로 인왕산의 역동적 풍경이 달려온다.

서울공예박물관은 모두를 환대하는 열린 공터일 뿐 아니라 시간을 엮고 도시를 잇는 길이기도 하다. 앞마당 자체가 부지 서쪽 감고당길과 동쪽 윤보선길을 연결하는 지름길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안동별궁의 정화당과 경연당 위치에 깐 화강암 판석 포장길을 따라 걸으면 시간의 파편을 품은 북촌 골목길들이 나온다. 박물관 앞마당을 통과 동선으로 사용하는 이들을 뒤쫓으니 윤보선길로 접어들었다. 노을에 걸린 인왕산의 자태에 정신을 빼앗긴 채 걷다 보니 마침 노포 호프집이 등장했다.

한겨레

안동별궁에서 풍문여고로, 다시 서울공예박물관으로. 멀리 인왕산 풍경이 달려온다. 사진 김종오 건축사진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가을 하면 발라드, 발라드 하면 바로 여기!
▶▶<한겨레> 후원하시면 콘서트 티켓을 드려요!▶▶<한겨레> 국장단이 직접 뉴스를 풀어 드립니다, H:730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