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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아내는 임신중단, 남편은 정관수술···노동해도 번성 못 하는 ‘이 시대의 전태일’들[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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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

조영한 지음|걷는사람|364쪽|1만5000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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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수술대에 누웠다. 한 사람은 오월 오일에, 다른 한 사람은 오월 팔일에.


조영한 소설집 표제작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2022)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린이날 아내는 임신 중단 수술을, 어버이날 남편은 정관 수술을 한다. 아이를 키울 여력이 안 돼 선택한 수술이다. 남편이 수술 뒤 귀가하며 맞닥뜨린 교회 십자가 밑에서 읽은 문장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이다.

등장인물들의 삶은 부조리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노동해도 번성할 수 없다. 그렇다고 회피할 수도 없다. 아내는 수술 뒤에도 돈을 벌러 나간다. 전에 일하던 콜센터는 계약이 끝났다. 정작 고기를 입에 잘 대지도 못하는 아내가 새로 찾은 일터는 사촌 언니의 정육점이다. 어깨너머로 배운 발골 일을 시작한다. ‘오늘’(2016)에선 고모가 자살 시도를 한 뒤 병원에 실려 가 치료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도 아빠는 택시 일 때문에 병문안을 미룬다.

‘묻혀 있는 것들’(2021)에서 표현한 각자도생은 다음과 같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이 든 여자가 얼굴을 목도리로 싸매고 텅 빈 리어카를 끌면서 눈길을 걸었다. 몸의 절반 이상이 희어진 모습이었고 간신히 움직이고는 있었으나 운동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 (아크릴, 스티로폼, 전구, 브래킷을 담은) 상자들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나이 든 여자였으나 상자에 누구보다 먼저 손을 댄 사람은 트럭에서 내린 남자였다. … 그녀는 울먹였고, 그는 상자들을 짐칸에 실었다. 세 명의 남자들은 그의 행동을 보면서 표정을 찡그렸으나 막아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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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인플루엔자(AI) 확진 판정을 받은 경기도 여주시의 산란계 농가 인근 오리 농장에서 8일 예방적 살처분이 진행되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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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처분되는 동물과 다르지 않을’
부조리 가득한 등장인물들의 삶
담담한 건조체로 세세하게 표현
감상·독백 선언 찾을 수 없지만
되레 현세의 비극 신랄하게 고발


조영한이 2016년 이후 공개한 4편의 단편 중 3편인 ‘오늘’ ‘묻혀 있는 것들’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 공통 배경 중 하나가 살처분 현장이다. 창세기 1장 28절의 저 ‘땅’은 현실에서 처참한 비극의 장소가 된다.

“두 대의 굴삭기가 농장과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땅을 파고 있었다. 병 걸린 가축들과, 병증은 없어도 죽어야 하는 가축들이 묻힐 자리였다.” 남편은 ‘환경의날’에도 살처분 현장에서 “산 것과 죽은 것을 가리지 않고 마대에 처넣”으며 일한다.

조영한은 현세 땅에 펼쳐진 비극을 담담한 건조체로 세세하게 써 내려 간다. “비닐 안으로 이산화탄소가 들어갔다. 새끼 오리들이 일제히 날갯짓을 했고 가스가 들어차기 전까지 따로따로 놀던 몸뚱이들이 한데 엉켰으며 비닐 바닥에는 검거나 노란 깃털들이 쌓였다. 비닐이 부풀었고 오리들 우는 소리도 커졌다. 오 분쯤 지나자 오리들 움직임은 사라졌고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가 없지 않았으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소설집에선 ‘괴로웠다’ ‘힘들었다’ ‘슬펐다’ 같은 형용사를 찾기 힘들다. “농장에는 죽여야 하는 가축들이 많아서, 두통과 토기는 찾아왔다”(‘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 중), “살아날 확률이 없는 개들이 녹물이 든 창살에 머리를 찧으며 우는 모습이 생각났다. 두 눈은 겁에 질려 있었고 입가에서는 게거품이 끓어서 턱까지 흘러내렸다”(‘오늘’ 중) 같은 문장에서 동물의 죽음에 관한 등장인물들의 심정을 짐작할 뿐이다.

소설은 여러 ‘강사’ ‘판매병’ ‘성매매 업소 직원’ 이야기로 이어진다. 소설에서는 감상도, 독백도, 선언도 찾기 힘들다. 주제 의식과 문제의식이 없다고 여길 일은 아니다. 작가가 압축한 건조체의 문장들은 되레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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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조영한. 걷는사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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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는 암소 몸속에 근이완제를 넣었다. 짧게는 십여 초, 길게는 일 분 내로 소를 죽이는 약이었다. 암소의 눈빛이 흐려질 즈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곁으로 다가왔다. 암소는 다리를 떨었으나 쓰러지지는 않았고 삼 분쯤 시간이 지났다. 송아지가 곁에서 물러나자 암소는 고꾸라졌다. 수의사의 눈시울이 발개졌고 소 주인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으나 남편은 울지 않았다.”

슬픔과 괴로움을 느끼더라도 “요즘에는 죽일 것들이 없느냐”며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현실이 이어진다. 구역질 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각오는 “죄도 없고 구원도 없으며 그저 원인과 결과가 있을 뿐”이라는 대사에 압축했다. 남편이 비닐 위로 오리를 몰면서, 아내가 수술 뒤 끙끙 앓다 내뱉은 혼잣말이다. 작가는 이 암울한 세상의 실상을 이렇게도 표현했다. “그들은 비닐을 타고 올라온 돼지들 얼굴이나 몸통을 넉가래로 후려갈겼다. … 구덩이는 흙이 덮이면서 평평해졌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해졌다.”

조영한이 절제의 언어 속에서도 화자의 입을 빌려 현실을 적은 몇몇 문장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다음과 같다. “오리가 반려견이나 반려묘로 태어났다면 이렇게 죽을 가능성은 적거나 없었다. 성격이 다른 동물들의 죽음에는 차등과 차별이 있었고, 그것이 현실이었다.” 이 차등과 차별의 현실은 인간 사회에도 적용된다. ‘오늘’에선 폐수 저장조 배출구 용접 중 일어난 화재로 외주 노동자들이 “피범벅인 몰골”로 죽어간다.

소설가 정지아가 읽어낸 건 이 시대 ‘전태일 후손’의 삶이다. 추천사에 “세계 최첨단 도시라는 한국에서 지하방을 빠져나오지 못해 홍수에 희생당한 일가족의 소식이 보란 듯이 뉴스를 도배하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조영한은 그 현실을 냉정하리만치 담담하게 우리 앞에 들이민다”고 썼다. 문학평론가 임정균이 해설에서 쓴 말은 다음과 같다. “이 소설들에서 우리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건 독자가 텍스트 바깥의 안전한 곳에서 이들의 일상을 바라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이 세계를 외면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우리 역시 구역질 나는 현실을 마주 보고, 이들의 울음을 들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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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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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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