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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이슈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 자백

도움 청할 기력도 없었다…'신청주의' 복지가 부른 세모녀 비극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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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지난 22일 찾은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 한 다가구주택. 전날(21일) 세 모녀로 추정되는 시신 3구가 발견됐다. 초인종 위에는 가스검침원의 연락달라는 메모가 붙어 있다. 채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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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경기도 수원시 한 다세대주택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세 모녀가 겪은 생활고는 16개월분 27만930원의 건강보험료 체납기록에, 절망감은 노트 9장 분량의 글에 그 흔적이 남았다. 이들이 체납한 건보료는 월 1만6993원꼴. 올해 기준 최저보험료 1만4650원보다 겨우 2200원 많은 액수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관계자는 “월 소득이 대략 100만원 정도의 극빈층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노트에 어머니는 본인이 난소암을 앓는 상황에서 장시간 경련이 멈추지 않는 희귀병을 앓는 첫째 딸을 지켜봐야 했던 고통과 2019년 무렵 루게릭병을 앓다 떠난 큰아들에 대한 상실감 등을 남겼다. 가장 역할을 하던 둘째 딸은 병원비 부담과 생활고 등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사업부도 후 빚만 남기고 먼저 세상을 등진 아버지에 대한 원망 등을 적었다고 한다. “첫째 딸은 병세 때문에 글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경찰의 추측이다.

빚 독촉을 피해 2년 전 경기도 화성시에서 수원시로 이사하면서 전입 신고도 하지 않은 세 모녀는 관공서 어디에도 도움을 청하지 못한 채 12평 남짓한 월셋집 안에 고립되어 갔다. 이들의 비극을 접한 일선의 복지 담당 공무원들은 “동사무소에 상담 한 번이라도 받았다면 극단적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거나 “전입신고만 됐어도 적어도 한 번은 찾아가기 때문에 딱한 사정을 파악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전입신고만 했다면 건보료 체납자 통지 등으로 인해 담당 공무원이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됐을 것이고, 방문해 실태만 확인할 수 있었다면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3인 가구 기준 중위소득(월 419만4701원)의 30%에 못 미치는 게 분명한 세 모녀가 기초생활보장 수급 자격을 얻었다면 월 125만원의 생계 급여와 월 42만원의 주거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이 집주인에게 “죄송하다”며 제때 못 낸 월세도 42만원이었다. 입원 시 본인 부담액도 0원인 1종 의료급여 수급권자에 해당했을 가능성도 크다는 게 복지 전문가들의 얘기다. 저소득층의 난치병 치료를 연 5000만원까지 지원하는 재난적 의료비 지원제도도 도입돼 있다. 수원시 관계자는 “긴급생계지원비(월 120여만원)나 긴급 의료비 지원 등 활용 가능한 다른 지원책도 마련돼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남긴 빚도 상속 포기 제도 등을 활용할 수 있었다면 떠안지 않을 수도 있었다.

중앙일보

지난 22일 찾은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 한 다가구주택. 전날(21일) 세 모녀로 추정되는 시신 3구가 발견됐다. 채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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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지원엔 “신고했다면” 또는 “신청했다면”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신청이나 신고 또는 상담을 의뢰할 기력조차 남지 않은 ‘주소 불명’의 이들 존재를 우리 사회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신청주의 극복’ ‘찾아가는 복지’가 복지의 화두로 떠올랐지만 사건은 반복돼왔다. 2019년 서울 관악구 한 임대아파트에서 40대 탈북민 엄마와 6세 아들이 숨진 뒤 두 달이 지나서야 발견된 ‘관악구 탈북 모자 사건’이나 2020년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발달장애인 아들과 어머니가 사망 다섯 달만에 발견된 ‘방배동 모자 사건’이 대표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특단의 대책”을 언급했고 김동연 경기지사도 “핫 라인 구축” 등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나섰다. 현장 관계자들은 “현재 수준의 찾아가는 복지로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발생하는 제2의, 제3의 세 모녀의 비극을 막기 어렵다”고 털어놓는다.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실 교수는 “저소득층에게 도움 될 본인부담금 상한제는 후불제고, 의료비 부담 문제를 막으려고 만든 재난적 의료비 제도는 신청적 성격이라 현실에선 잘 작동하지 않는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경기도 한 지자체 복지 담당 공무원은 “실거주지를 알 수 없으면 일이 끝나는 현 방식으론 숨은 저소득층을 찾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며 “거주지 이전시에 대상자 상황을 추적관리하는 지역 연계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의 주문도 비슷했다. 정 교수는 “고물가 등으로 극빈층이 늘어나는 게 현실”이라며 “경찰과 공조해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추적하는 광역 수준의 추적 복지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이웃들의 관심은 제도가 성공하는데 필요한 대전제”라고 덧붙였다.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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