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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변기물이 순식간에 방으로” 반지하에서 겨우 생존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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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수 피해 집중된 서울 관악구·동작구 일대

골목에는 젖은 장판과 가전제품 등 산더미

서울 20만호가 지하·반지하 방


한겨레

10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골목 양쪽으로 침수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내놓은 각종 집기들이 놓여 있다.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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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커먼 자국이 다 똥물 자국이에요.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로 닦고 해도 안 지워지네요. 약을 뿌려도 냄새도 안 빠지고.”

10일 오후 서울 동작구 신대방1동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사는 백아무개(66)씨는 장롱 밑 장판을 들어 올려 시멘트 바닥에 있는 검은 얼룩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젖은 바닥을 말리기 위해 보일러를 튼 까닭에 바깥보다 실내 온도가 더 높아, 백씨는 이마와 목에 수건을 두른 채 굵은 땀을 훔쳤다. 지난 8일 저녁 7시30분께 백씨의 집 현관문 앞에 있던 정화조에서 물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집안에서는 화장실 하수구를 통해 물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백씨는 “양수기 3대로 물을 정신없이 퍼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침수 피해가 집중된 서울 관악구·동작구 일대를 둘러보니 지난 8∼9일 퍼부은 폭우의 흔적이 역력했다. 차도가 지나다니는 대로에도 마르지 않은 진흙이 군데군데 있었고, 침수된 차들도 방치돼 있었다.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좁은 골목 안쪽에는 반지하 거주자들이 내놓은 집기들로 차가 지나다니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난 8일 밤 40대 자매와 딸 등 세 가족이 숨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주택가 일대는 양옆으로 장판·가구·옷·매트리스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세 사람이 숨진 주택에서 직선거리로 약 100m 떨어진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사는 김아무개(52)씨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찔했다”고 말했다. 이 주택 반지하에 있는 가구는 총 3가구로 거주자 모두 현관문을 열어둔 채 침수된 집을 정리 중이었다. 김씨는 “(8일에는) 대전으로 건설 현장 일을 하러 갔기 때문에 집에 없었다. (대피한)옆집 사람 말을 들어보면 밤에는 물이 가슴까지 찼다고 하는데 그러면 현관문이 열렸겠느냐”며 “만약 그날 집에서 자고 있었다면 방범창 때문에 창문으로도 나갈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 주민센터에 피해 신고를 했지만 “신고해봤자 얼마나 나오겠느냐. 답이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김씨는 냉장고·티브이(TV)·밥솥·선풍기 등 집안에 있는 거의 모든 가전제품을 버리고 전날(9일) 밤부터 여관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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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1동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사는 백아무개씨가 안방 장판을 들어올려 정화조 물이 넘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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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밤 폭우로 생명의 위협을 코앞까지 느낀 주민도 있었다. 남편과 함께 반지하 주택에 살고 있는 임아무개(63)씨는 “내가 양수기를 빌리러 주민센터에 간 사이에, 집 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게 현관문을 닫고 있던 남편이 집밖으로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며 “119가 창문을 뜯어내고 피아노 위에 올라가 있던 남편을 구조했는데,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임씨는 “또 비가 온다는데 또 집이 잠길까 봐 걱정이 크다”고 한숨을 쉬었다.

11일에도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서울 관악구의 좁은 골목 안쪽에는 반지하주택 거주자들이 내놓은 집기들로 가득했다. 정리 작업도 한창이었다. 골목 안에서는 굴착기 기사가 쓰레기차에 쓰레기들을 싣거나, 육군특전사령부 소속 군인들이 조를 나눠 주택에서 침수된 폐기물을 도로 쪽으로 꺼내고 있었다. 중고가전 매입 상점 앞에는 세탁기·냉장고·에어컨·실외기 등이 25대 이상 쌓여 있었다.

“냉장고를 하나 사도 80∼90만원 하는데 어떻게 하나요…우리는 살 돈이 없는데. 저거 사고 나면 한달을 어떻게 살아요, 아이고.”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반지하 주택에 사는 유아무개(71)씨는 지난 9일부터 사흘 연속 주차장에서 숟가락·국자 등 가재도구들을 락스를 희석한 물에 적신 수세미로 닦고 있었다. 다세대 주택 입구 옆에 있는 주차장 안쪽에는 냉장고·빨래건조대·청소기 등 유씨 부부가 반지하 주택에서 꺼낸 살림살이가 놓여 있었다. 유씨 부부의 반지하 집은 지난 8∼9일 내린 폭우로 전부 잠겼다. 유씨는 “평생을 장만한 살림살이인데 눈물이 난다”며 “새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건강이 좋지 않고, 남편은 30년 정도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가 귀가 잘 들리지 않는데 이런 사람을 잘 써주지 않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침수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당장은 임시거주시설, 자녀·친인척집 등에서 머무르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도 다른 주거지를 알아보기도 어려운 처지다. 동작구 주민 심인택(75)씨는 “나는 기초생활수급자라 나라에서 빌려준 돈(LH 저소득층 주거비 지원)으로 살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다”며 “이전에 대림동에 살 때도 침수 피해를 겪은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임씨도 “부동산(공인중개사 사무소)에 살 집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이 근처가 다들 형편이 이래서 방이 없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으니 절대 반지하는 살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싼 집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서울시가 지난 10일 “지하·반지하는 주거 용도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주민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책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보였다. 반지하 주택에 살다가 이번 폭우 피해를 입은 김용천(64)씨는 “좋은 대책인 것 같지만 반지하가 높이 있는 곳보다는 훨씬 싼데, 이 가격에 다른 곳을 구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집주인들은 폭우에 자신들도 피해를 입었다고 토로했다. 반지하주택 다섯가구에 세를 주고 있는 반아무개(56)씨는 “재산상의 피해가 크다. 세입자들이 보증금을 빼달라고 하면 다 빼줘야 하고, 세탁기·냉장고·에어컨을 모두 새로 사야 하지만 정부에서 집주인들에게 피해보상을 지원해준다는 말은 아직 못들었다”고 말했다. 집앞으로 침수된 가전들을 옮기고 있던 김정수(70)씨도 “예전에 구청에서 차수막을 설치해줬는데도 역부족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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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폭우로 물에 잠긴 흔적이 남아있는 심인택 씨의 집안 모습.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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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폭우로 물에 잠긴 흔적이 남아있는 심인택 씨의 집안 모습.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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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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