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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곡물 자급률 80%에서 20%로 '뚝' ...한국의 선택은 [스페셜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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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ECIAL REPORT : 곡물자급률 20% 한국의 선택은 ◆

매일경제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2020년을 기준으로 사료용을 포함한 곡물 자급률 20.2%. 대한민국 식량안보 상황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숫자다. 소비되는 곡물의 80%를 해외에 의존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가 곡물을 주로 들여오는 나라는 미국과 호주,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크라이나 등이다. 만약 이런 나라들에서 갑자기 곡물 수출을 금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의 식량 공급 체계가 상당한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쌀은 자급률이 92.8%에 달하는 만큼 밥은 어떻게든 먹을 수 있겠지만 육류와 가공식품은 수급에 엄청난 문제가 생길 것이다. 소와 돼지, 닭을 기르는 데 필요한 사료는 원재료 대부분이 외국산 곡물이고, 우리나라 식품업계가 사용하는 원료 곡물 역시 80%가 수입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상 속에서나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고 있다. 코로나19 발생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곡물 생산국들의 수출 금지 조치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는 더 많은 나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들어 밀과 옥수수, 팜유, 대두유 등 식품업계 4대 원재료에 수출제한 조치가 취해진 건수가 41건에 달했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주요 수입국들은 여기에 아직 포함되지 않았지만 상황은 언제든 돌변할 수 있다.

해외에서 곡물을 수입하지 못할 위험성에 대비하려면 곡물 자급률을 크게 끌어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이유다. 정부도 이에 부응해 자급률 제고를 위한 다양한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그런데 곡물 자급률 제고 전략으로 한국의 식량안보를 지킬 수 있을까.

◆ 곡물 자급률 추락은 고도성장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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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곡물 자급률이 낮아진 건 사실 고도성장과 관련이 깊다. 곡물 자급률은 1970년만 해도 80.5%에 달했다.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30년 만인 2000년에 29.7%까지 급전직하했다. 50%포인트 추락이다. 이어 최근까지 20년간 완만하게 더 떨어졌다.

곡물 자급률이 하락한 50년간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가장 큰 변화는 경제 성장의 대가로 농지 면적이 대폭 감소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농지 면적은 1970년 229만8000㏊에서 2020년 156만5000㏊로 31.9% 줄었다. 전체 농지의 대략 3분의 1이 공장과 아파트, 상가로 전환된 것이다. 곡물 생산량은 710만t에서 429만t으로 39.5% 줄었다. 농지가 줄어 생산이 줄어드니 자급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 극적인 변화는 육류 소비의 증가다. 1인당 연간 육류 소비량이 1970년 5.2㎏에서 2020년 52.5㎏으로 10배 늘었다. 그런데 육류(소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 1㎏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평균적으로 7㎏의 곡물이 필요하다. 우리가 육류를 더 먹는 동안 육류보다 7배(중량 기준)나 많은 곡물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리고, 고기를 양껏 먹으면서 곡물 자급률이 왜 이렇게나 낮은 거냐고 비판하면 사실 정부 당국자들로서는 좀 억울할 수 있는 셈이다.

◆ 자급률 높이려면 경지 이용률 높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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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낮은 곡물 자급률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급률을 높이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농지 면적을 확대해서 국내 곡물 생산량을 늘리거나 해외에서의 곡물 수입을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농지 면적은 지금도 계속 줄고 있다. 더 줄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1인당 육류 소비량도 여전히 증가 추세다. 곡물 수입량도 매년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는 현재 밀과 콩의 생산을 늘려 곡물 자급률을 높이는 전략을 펴고 있다. 정부 목표가 잘 수행되면 밀 자급률은 2020년 0.8%에서 2027년 7.9%로, 콩 자급률은 30.4%에서 40.0%로 높아진다. 이를 통해서 높일 수 있는 곡물 자급률은 대략 2.0%포인트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최상의 시나리오로 밀과 콩 재배를 늘려도 곡물 자급률은 20%에서 고작 22%로 높아진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경지 이용률을 높일 것을 제안한다. 일모작을 하던 경지에 이모작을 도입하는 식이다. 우리보다 낮았던 곡물 자급률을 지금은 더 높이 끌어올린 일본(2019년 기준 28.0%)이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경지 이용률 확대였다. 다만 줄어드는 농경지에서 이용률을 높이는 것도 분명히 한계가 있다. 곡물 자급률 제고 정책의 한계인 셈이다. 식량안보를 강화할 수 있는 새롭고 창의적인 방법이 필요한 상황이다.

싱가포르 사례가 작은 힌트가 될 수 있다. 식량의 90% 이상을 해외에 의존하는 싱가포르가 식량안보지수(Global Food Security Index·GFSI) 세계 1위를 차지한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식량안보지수는 3개 지표로 평가한다. 식량에 대한 경제적인 접근성(Affordability)과 충분한 공급 능력(Availability), 그리고 품질과 안정성(Quality and Safety)이다. 자급률이 낮더라도 외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데 있어서 그 통로가 매우 안정적이고 경제적이면서 품질이 좋으면 식량안보지수를 높일 수 있다는 뜻이다.

◆ 글로벌 곡물 공급망 참여 늘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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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자급률에 얽매이기보다 싱가포르처럼 식량안보지수를 높일 방안을 찾는 게 더 현실적이다. 그 방법 중 하나는 바로 해외 농지 개발과 글로벌 곡물 공급망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해외농업개발협회에 따르면 국내 206개 기업이 32개국에 나가서 해외 농업을 펼치고 있다. 우리 기업이 러시아 연해주를 비롯한 해외에서 생산한 작물(오일팜 제외)은 작년에 8만2752t에 달했다. 이 중 29%에 달하는 2만3975t을 국내로 들여왔다. 옥수수(1만1000t)와 콩(8100t)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해외 진출 건수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이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이 필요하다.

그런데 해외 농지 개발보다 더 효과적인 방안이 있다. 바로 해외 현지에서 곡물 터미널을 인수하는 것이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우크라이나 곡물 터미널 지분 75%를 인수했고, 하림(팬오션)은 미국 워싱턴주 롱뷰항에 있는 곡물 터미널에 2대 주주(36.0%)로 참여했다. 두 회사가 작년에 취급한 곡물의 양은 115만t인데, 이 중 절반이 넘는 61만t을 국내로 들여왔다. 곡물의 국내 반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해외 농지 개발에 비해 훨씬 효율적인 셈이다.

우리 기업들이 해외 공급망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곡물 터미널 인수를 지원하는 정책적 묘수가 절실한 배경이다. 직접적인 지원은 어렵더라도 장기 저리 대출이나 세제 혜택 등 간접적인 지원은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국제 곡물 파동 등 유사시에 가격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국내로 들여올 경우에는 손실을 보전해주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물론 곡물 터미널을 보유하고 있어도 해당 국가에서 수출제한 조치를 취하면 국내로 반입하기 어려운 만큼 터미널 인수 대상 국가를 다변화하는 노력도 동반돼야 한다.

◆ 새만금에 곡물 메이저들의 터미널 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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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곡물 공급망에 참여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새만금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새만금에는 5만t급 선박 9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대규모 항만이 건설되고 있다. 최고 수심도 30~40m에 달하는 천혜의 항구다. 이 항만에는 250만평 규모 배후 용지도 함께 조성되고 있다. 2025년이면 2선석 규모의 1단계 공사가 완료되면서 35만평 규모 배후 용지가 들어서게 된다. 이 공간에 곡물가공 유통단지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른바 '식량 콤비나트'라는 이름의 곡물가공 유통기지를 건설해 밀과 옥수수, 콩 등 곡물을 해외에서 들여와 가공한 뒤 국내에서 소비하거나 제3국으로 재수출하자는 주장이다. 그렇게 설치된 시설은 유사시 그 자체가 비축기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식량안보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글로벌 공급망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곡물 메이저들의 터미널을 새만금에 유치하자는 아이디어도 제시되고 있다. 글로벌 곡물 시장은 이른바 'ABCD'라고 하는 ADM, 번지, 카길, 드레퓌스 4개사가 전체의 75%를 장악하고 있다.

곡물 메이저들은 타깃 시장 중 하나를 중국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1인당 육류 소비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어 사료용 곡물에 대한 수요가 장기적으로 급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과 가깝고,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새만금에 곡물 터미널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한다면 메이저들이 충분히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새만금에 메이저들의 대형 터미널이 있으면 식량 대란 등 위기 때 우리나라 식량안보의 파수꾼 역할을 할 수 있다.

◆ 애그테크·푸드테크·바이오기술 활용


식량안보에서 점차 중시되는 것은 바로 첨단기술의 활용이다. 최근 들어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애그테크와 푸드테크, 바이오테크를 식량안보 강화 전략에 접목하자는 것이다. 애그테크와 푸드테크는 종자 개발부터 작물의 생산, 수확, 가공, 유통, 물류, 외식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씨앗부터 식탁까지 이어지는 먹거리 밸류체인(생태계) 전체에 적용된다. 이 밸류체인 단계마다 첨단기술을 접목하면 식량안보를 강화할 수 있다.

예컨대 디지털 육종 기술을 활용해 수량성과 내병성이 우수한 종자를 개발하고, 스마트농업을 통해 곡물 농사의 단위 면적당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식량안보에 직결되는 일이다.

최근 들어 각광받는 식물성 대체육이나 배양육, 대체 탄수화물 등 푸드테크 산업을 키우는 것도 식량안보에 도움이 된다. 대체육이 축산물을 대신하면 사료용 곡물의 수요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식량의 거의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는 아랍에미리트(UAE)는 푸드테크 스타트업 발굴을 통해 식량안보를 강화할 목적으로 '푸드테크 챌린지'라는 공모전을 열고 있다.

유전자가위와 같은 바이오 신기술을 농업에 접목하는 것도 유력한 대안이다. 유전자가위는 유전자변형농작물(GMO)처럼 외부 유전자를 주입하는 게 아니라 특정 유전자를 잘라내 염기서열 일부를 바꾸는 기술로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 적극 상용화하고 있다. 영국은 유전자가위를 아직 승인하지 않고 있는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자마자 유전자가위 승인에 착수했다.

테크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 위해서는 한국투자공사(KIC)와 같은 국부펀드를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식량 자급률이 10%에 그치는 싱가포르는 국부펀드인 테마섹과 싱가포르투자청(GIC)을 활용해 종자 회사와 수직농장, 식물성 대체육 회사 등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자급률을 2030년까지 30%까지 높이기 위해서다.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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