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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서해 피살 공무원과 文사저 앞 시위에 대한 민주당 태도와 '공감의 배신' [핫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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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이 '공감'의 덕목을 칭송할 때 심리학계의 석학인 폴 블룸 예일대 교수는 과감하게 "공감에 반대한다"고 했다. 그의 책 제목 자체가 'Against Empathy'인데, 말 그대로 '공감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그의 논리는 명쾌하다. 인간은 자기 편의 고통에 공감할 뿐, 남의 편의 고통에는 모르쇠 한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증거도 많다. 인간의 뇌는 자신과 심리적 거리가 먼 집단의 구성원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로 뇌를 스캔하면 상대를 '사물'로 인식하는 영역이 활성화된다고 했다. 상대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으니 그의 고통에 공감할 수도 없게 된다. 상대에게 냉정해진다. 상대가 내 이익에 반한다 싶으면 손쉽게 공격하게 된다.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낸다. 반면 자기 편의 고통에게 과도하게 공감한다. 그러다 보면 공감 탓에 공동체의 분열이 더욱 심해진다.'공감의 배신'이라고 할 만하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형태를 보면서 새삼 '공감의 배신'을 느끼게 된다. 윤석열 정부는 최근 "2020년 9월 서해 상에서 북한군에 피살된 공무원이 월북을 시도한 것이라고 볼 증거가 없다"고 발표했다. 월북으로 판단한 당시 민주당 정부의 발표를 뒤집은 것이다. 이에 대해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그 공무원에게) 월북 의사가 있었는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하냐"고 했다.

우 위원장의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목숨을 잃은 공무원과 그 가족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공감한다면 나올 수가 없는 발언이다. 한국 사회에서 '월북'이라는 낙인은 치명적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배신한 행위로 간주된다. 그 가족 역시 '배신자의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월북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가. 민주당 사람들의 마음이 참으로 냉정하다 싶었다.

폴 블룸 교수의 말이 맞았던 것인가. 문재인 정부가 충분한 근거 없이 월북으로 판단한 거라면 민주당은 타격을 입게 된다. 그래서 민주당은 "월북이 아니다"라고 호소하는 그 공무원의 가족을 자기들 편이 아니라고 이미 편가름을 한 것인가. 그래서 그 가족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인가.

반면 민주당은 같은 편의 고통에는 충분한 공감 능력을 보여주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그 가족이 사저 앞 욕설과 협박 시위로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했다. 그 고통에 함께 아파했다. 심지어 민주당의 한 국회의원은 문 전 대통령 집에서 재배하는 블루베리의 고통에까지 공감했다. 그 블루베리가 욕설 시위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까 걱정한 것이다. 물론 욕설 시위는 잘못된 것이다. 누구도 욕설과 협박을 당해서는 안된다. 그건 인간의 보편적 권리다. 안타까운 점은 민주당은 왜 문 전 대통령에게 보인 공감 능력을 서해에서 죽음을 당한 공무원과 그 가족에는 보여주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왜 민주당의 공감은 자기 편에게만 한정돼 있느냐는 것이다.

올바른 지도자라면 공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범위, 즉 '공감의 원'을 넓힐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 폴 블룸 교수의 주장과 반대되는 증거도 꽤 많이 쌓여 있다. 인간의 공감 능력은 매우 탄력적이어서 확대 가능하다는 심리학 연구 결과도 많다. 인간은 스스로 노력하고 충분한 계기만 있으면 내 편이 아닌 남의 편의 고통에도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감의 배신에 당할 게 아니라 공감을 인간의 보편적 덕목으로 확장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치열한 교전을 멈추게 한 승려들의 행진이 기억난다. 심리학자 다니엘 골먼의 책 '감성지능'에 나오는 이야기다. 미군 한 소대가 논두렁에 쭈그리고 앉아 베트콩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논두렁을 가로지르는 길 위로 스님 6명이 줄을 지어 나타났다. 스님들은 조용하고도 정돈된 자세로 화염 속을 태연하게 지나갔다.

현장에 있었던 한 미군 병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은 오른쪽도 왼쪽도 보지 않았어요. 그저 앞만 보고 지나갔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그들을 쏘지 않았습니다. 스님들이 천천히 논두렁 사잇길을 완전히 통과한 뒤에 나는 갑자기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지요. 더 이상의 싸움은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하루만이라도 말이죠. 그러한 감정은 나만 느꼈던 것이 아니었나 봐요. 양쪽 모두가 사격을 중지했으니 말이지요. 그날 우리는 더 이상의 전투를 하지 않았답니다."

그 스님들과 같은 용기를 보여줄 정치 지도자는 한국에 없는 것인가. 상대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없애고, '우리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인간애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지도자, 그래서 서로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도록 돕는 지도자, 그런 정치 지도자를 만나는 건 불가능한 일인가. 오늘날 한국 현실은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지 않는 지도자만 만나더라도 복받았다는 느낌이 들 지경이다.

[김인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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