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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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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 '사각철판'이 힌트다...靑 둘러싼 '보이지 않는 비밀' [청와대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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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과사전 5]





▶청와대 백과사전 1- 걸어서 한바퀴(시설물과 등산로)



▶청와대 백과사전 2- 알고 걷는 재미(자연유산 문화유산)



▶청와대 백과사전3-서울 타임캡슐 인근 동네 한바퀴



▶청와대 백과사전 4-전면개방까지83년

▶청와대 백과사전 5-보이지 않는 물길

▶청와대 백과사전 6-풍수 이야기

중앙일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백악산 꼭대기에 내린 비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물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 북쪽 홍제천, 동쪽 삼청동천, 서쪽 백운동천, 남쪽 대은암천으로 흘러든다. 산책로가 있는 홍제천은 낯설지 않은데 나머지 하천 셋은 생소하다. 정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하천은 있고 여전히 물이 흐른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이들 하천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물길을 찾아 백악산 동·서·남쪽을 훑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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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경 만든 도성지도. 서울대 규장각 소장. 도성 주변의 물길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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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 다 묻어

1900년대에 들어서며 일제는 조선 침탈 속도를 높인다. 이를 위해 철도와 도로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적극 확장한다. 1899년에 경인선, 1904년에는 경부선을 개통한다. 500년 넘게 이어져 온 서울의 도시 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사대문 안 도로 골격이 이즈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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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이 작성한 서울 지도 일부. 이때만 해도 청와대 경복궁 일대의 물길이 꽤 많이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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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서울 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다. 개발연대로 들어서며 서울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1970년에 550만 명이던 인구는, 올림픽이 있던 1988년에 1000만 명을 돌파한다. 마이카 시대가 열리며 폭증하는 차량은 도시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도로를 넓히고 주차장을 늘려야 하지만 도심에는 그럴 만한 땅이 없었다. 하천 복개(覆蓋 뚜껑을 덮는 일)가 가장 쉬운 해법이었다. 돈 덜 들고, 민원 줄이고, 공사 빨리 끝내고, 주차장 공간도 생기고, 게다가 하수도 악취까지 묻어버리니 일거오득이었다. 1970년대 이전에는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생활하수가 동네 개천으로 흘러 들어갔다. 큰비라도 내리면 온갖 쓰레기는 물론이고 오줌똥까지 섞였다. 지금은 복개를 하더라도 하수관로를 따로 만들지만 그때는 그냥 덮었다. 하천 대부분은 동네와 동네를 가르는 자연 경계이기 때문에 행정상 이해충돌도 적었다.

조선 시대 도성 안에는 청계천으로 들어가던 물길이 스무 개가 넘었다. 1977년에 청계천을 마저 덮으며 이들은 모두 사라졌다. 불과 70여 년 만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백운동천 대은암천 삼청동천도 땅속으로 들어갔다. 도시는 편의를 얻었지만 도랑을 잃고, 가재도 잃었다. 환경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하천을 덮어 만든 길은 조금만 눈여겨 보면 알 수 있다. 길을 따라 수시로 맨홀이 나타나고, 아스팔트 위에 다리 상판처럼 콘크리트 이음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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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경복궁 백악산 일대 모습. 오른쪽 점선 안 경복궁 담장 옆으로 흐르는 삼청동천이 보인다. [청와대 경호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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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동쪽-삼청동천

지금의 삼청로, 그러니까 동십자각에서 건춘문(경복궁 동문)을 지나 삼청공원 쪽으로 구불구불 올라가는 길이 삼청동천이다. 종로 11번 마을버스 종점에서 100m쯤 올라가면 삼청테니스장이 나온다. 백악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은 여기서 땅속으로 들어간다. 삼청로를 따라 내려가면 수시로 맨홀이 나타난다. 길 아래에는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인공수로인 사각형 암거(closed culvert)가 묻혀있다. 길 위 중간마다 철판으로 만든 커다란 사각형 맨홀도 보인다. 수로를 정비할 때 작업자들이 드나드는 입구다. 동네 사람들이 나와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멱을 감던 시절 삼청동천에는 북창교, 장원서교, 십자각교, 중학교, 혜정교 같은 다리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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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경. 동십자각 옆으로 흐르는 삼청동천. 지금은 길이 나며 동십자각은 섬이 됐지만 당시에는 경복궁의 담장이었다. 문화재청.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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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경 경복궁 동쪽에 있던 광화문.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완공하며 이 자리로 옮겼다. 뒤에 백악산, 앞에 물이 흐르는 삼청동천이 보인다. 문화재청.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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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개공사 중인 삼청동천. [청계천 박물관]


광화문이 삼청동천 옆에 서 있던 때가 있었다. 일제는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며 그 앞에 버티고 선 광화문을 헐어버리려 했다.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계획을 바꿔 1927년에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쪽으로 옮겼다. 이전한 광화문은 1929년 열린 조선박람회의 정문으로 쓰였다. 한국전쟁 때는 폭격을 맞고 허물어진 뒤 1968년에 지금 위치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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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11번 마을버스 삼청동 종점에서 왼쪽 주택가로 들어가면 지금도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길은 여기서 땅속으로 들어가 삼청테니스장쪽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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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천의 하류인 동십자각에서 청계천까지를 따로 중학천이라 불렀다. 조선 사부학당 가운데 하나인 중부학당 앞을 흘러서 붙은 이름이다. 중학천 옆에는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 집터가 있었다. 정도전은 1398년 1차 왕자의난 때 이방원에게 죽는다. 그 뒤 정도전 집 마구간 자리에 사복시(司僕寺)가 들어섰단다. 왕실의 말과 마구를 관리하는 관청이다. 일제강점기 사복시 터는 군마대와 수송공립보통학교, 광복 뒤에는 서울지방경찰청 기마대가 됐다. 지금의 이마(利馬)빌딩, 종로구청, 종로소방서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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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공관 앞 삼청로. 길 위의 사각형 뚜껑은 맨홀이다. 길 아래에 삼청동천 물길이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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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천은 1965년에 덮어 길을 냈다. 2009년 서울시는 교보문고 뒤쪽인 청계천에서 종로구청까지 340m를 중학천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했다. 하지만 자연하천과는 거리가 먼 전시용 인공하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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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문로 경복궁역 근처. 길 위쪽으로 올라가면 자하문이 나온다. 길 위의 사각 철판은 맨홀. 백운동천 물이 길 아래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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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서쪽-백운동천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 능선에 창의문(자하문)이 있다. 이 일대를 조선 시대에는 백운동이라고 불렀다. 청계천의 본류인 백운동천(白雲洞川)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경복궁역으로 내려가는 자하문로 밑이 백운동천 물길이다. 자하문로를 따라 내려온 물길은 경복궁역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 세종문화회관 뒤편으로 흐르다가 동아일보사 앞에서 청계천으로 들어간다. 백운동천은 상류 일부를 빼고 1920년대부터 덮이기 시작했다. 물길이 살아있을 때는 신교, 자수교, 금천교, 종침교 같은 다리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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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역 사거리. 사진 위쪽이 자하문 가는 길. 아래쪽이 세종문화회관 뒷길이다. 하수구를 들여다보니 바닥이 깊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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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천에는 청풍계, 옥류동천, 사직동천, 경희궁 내수, 경복궁내수 같은 지류가 있다. 경복궁내수를 빼고는 모두 인왕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다. 청운동에 있는 청풍계와 수성동계곡에서 내려오는 옥류동천은 조선 시대 명승으로 이름났다. 옥류동천은 우리은행 효자동 지점 앞에서 백운동천과 만난다. 사직동천은 사직단을 지나 서울시경 앞으로 흐르고, 경희궁내수는 궁에서 나와 세종대로 사거리 쪽으로 흘렀다. 경복궁내수는 경회루 남쪽에서 나와 정부서울청사 뒤를 지나 백운동천과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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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광화문 광장 문화재 발굴 현장. 조선시대 물길이 보인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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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개선공사를 하며 땅을 파니 옛 문헌과 지도로만 보던 조선 시대 육조거리가 드러났다. 본래의 자연퇴적층 위에, 임진왜란 전후, 경복궁 중건기, 일본강점기, 현대가 시간별로 착착 쌓여 있다. 물길도 드러났는데 위치로 보아 경복궁내수가 아닌 하수를 흘리던 도랑으로 보인다. 백운동천 주변에는 겸재 정선, 송강 정철, 김상헌 집터가 있다. 이중섭 가옥, 박노수 가옥, 신익희 선생 옛집, 이상범 가옥, 김정희 옛집, 홍종문 가옥, 배화여고 캠벨 기념관 같은 역사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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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관저 정문인 인수문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이 물이 흘러 녹지원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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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남쪽-대은암천

백악산 남쪽 골짜기에서 청와대를 지나 경복궁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이 대은암천이다. 경복궁의 금천(禁川)이다. 금천은 궁궐이나 왕릉 들어갈 때 건너가는 물길을 말한다. 물을 건너며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한다는 의미가 있다. 궁궐마다 금천이 있는데 경희궁내수(경희궁), 정릉동천(덕수궁), 옥류천(창경궁), 북영천(창덕궁)이 그들이다. 금천의 물은 궁궐에 불이 나면 소방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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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경내 물길. 오른쪽 물길은 드러나 있지만, 왼쪽 물길은 땅속에 묻혀 있어 지형을 살피며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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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암천 물길은 두 개다. 1번 물길은 청와대 관저~녹지원 옆~경호실과 여민관 사이~신무문 오른쪽 담장 아래 수문~향원정~경회루에 이른다. 청와대앞길만 지하로 흐르고 나머지 구간은 온전히 드러나 있다. 물길이 지나는 청와대 녹지원 일대는 숲이 우거져 운치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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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궐도형에 보이는 경복궁내 물길. 북궐도형은 일제가 경복궁을 훼손하기 직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왼쪽 영추문 위쪽으로 서쪽에서 들어오는 물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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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물길은 영추문 북쪽에서 궁의 담장 아래를 지나 경회루로 들어가는데 발원지가 아리송했다. 청와대 경내를 오르내리며 지형을 꼼꼼히 살펴봤다. 처음에는 본관 뒤쪽 계곡에서 나오는 물길이 1번 물길과 녹지원 앞에서 만난다고 추측했다. 아무리 봐도 아니었다. 본관 뒤에서 나온 물길은 영빈관을 거쳐 효자동 방향으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영빈관 부근이 조선 시대에 팔도배미(임금이 손수 농사짓던 땅) 자리였으니 당연히 개울이 있었겠다. 청와대 본관은 노태우 정부 때 지었다. 토목공사를 할 때 계곡 바닥에 콘크리트관을 묻어 물길을 내고, 그 위에 본관과 대정원을 조성했을 테다.

영빈관 쪽에서 나온 2번 물길은 분수대, 진명여고(목동으로 이전) 터의 옆을 돌아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궁으로 들어가는 자리에 있던 다리가 서금교(西禁橋)다. 금천의 서쪽에 있는 다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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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보이는 청와대 본관 뒤쪽 계곡이 대은암천의 발원지 중 하나로 추측한다. 본관과 그 앞의 대정원 아래에는 물길이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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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녹지원 옆 계곡. 대은암천 물길 중의 하나다. 신무문 옆을 지나 경복궁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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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과 2번 물길은 경회루 옆에서 만나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90도 꺾는다. 이 지점에서 경복궁내수가 갈라져 남쪽으로 나가고, 대은암천(금천)은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흘러 동십자각 남쪽에서 삼청동천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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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진명여고 옆을 돌아 흐르던 대은암천의 흔적으로 보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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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여고 터 옆으로 구불구불한 골목이 있다. 대은암천이 흐르던 물길 위를 덮어 낸 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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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닥 아래 숨은 역사

청계천은 다시 햇살 아래로 나왔다. 주변 환경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훌쩍 자란 나무들은 제법 너른 그늘을 드리우고, 한강에서 올라온 물고기들이 지천이고, 돌에는 다슬기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물가에는 직장인들과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청계천으로 흘러들던 크고 작은 개울들은 여전히 묻혀있다. 물길 다시 살아나면 서울은 자연스레 생태환경 도시가 되지 않을까. 청와대와 경복궁 주변을 걸으며 틈틈이 길바닥을 보는 느낌은 색다르다. 발아래에 서울의 과거와 미래가 있다.

글·그림·사진=안충기 기자·화가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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