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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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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은 중국에 가고, 尹은 광주에 가고 [노원명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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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의원 100여명과 함께 지난 18일 광주에서 열린 5·18 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두고 언론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국민통합 행보로 봤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승리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더불어민주당 의원 전원을 대동하고 광주에 갔다면 어땠을까. '전승 행사'로 보이지 않았을까. 정치란 묘해서 누가 하면 로맨스인 것이 누가 하면 불륜이 되고 어제는 틀렸던 것이 오늘은 옳기도 하다.

윤 대통령이 광주에 '큰 부담없이' 갈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보수진영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대선 승리로 보수진영엔 여유가 생겨났다. 그들이 지지하는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헌법 전문에 5·18 정신을 삽입하겠다고 해도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다. 만약 호남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당선된 대통령이 똑같은 일을 했다면 보수진영은 이를 노골적인 국민분열 책동으로 봤을 것이다.

이 현상을 가리키는 정치 용어가 있다. '중국 가는 닉슨(Nixon goes to China)'이다. 1972년에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에 갔다. 중국 공산화 이후 첫 미국 대통령 방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 기성세대들 사이에 공산화 이전 중국에 대한 기억과 향수가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그들의 대통령이 어제까지 적이었던 마오쩌둥과 악수를 한다. 만약 그 대통령이 민주당 출신의 리버럴리스트였다면 보수층의 거부감은 굉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닉슨은 '반공투사'로 정치 경력을 쌓아온, 공화당원 중에서도 '매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보수층은 의심하지 않았다.

Nixon goes to China는 특정 이념지향을 지닌 지도자가 그와 반대 방향 정책을 펼칠때 여론 설득이 용이한 현상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Only Nixon could go to China'라고 쓰기도 한다. 매파 반공주의자인 닉슨이 아니었으면 중국에 못갔을 것이라는 의미를 더욱 강조한 표현이다.

반공주의자 이전에 탁월한 외교전문가로 전략적 사고를 했던 닉슨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대중관계 회복 필요성을 지각하고 있었다. "중국을 세계 국가연대의 바깥에 고립시키는 것은 그들의 환상과 증오를 부추기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중국의 이웃국가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이 작은 지구에 1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분노의 고립 상태에서 살아갈 공간은 없다."(1967년 10월호 포린어페어스지 기고)

윤석열 대통령이 광주에 간 것은 국내 정치일 뿐이지만 닉슨의 중국행과 맥락적 유사함이 있다. 그는 기념사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피로써 지켜낸 오월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또 "오월의 정신은 지금도 자유와 인권을 위협하는 일체의 불법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할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이 발언이 '호남인이여, 원래 당신들이 보편 가치의 편이었다. 이제 다시 그 편에 서 달라'는 제안이 아닌가 한다. 닉슨이 중국의 고립을 위험하다고 본 것처럼 윤 대통령은 대선후 심화할지도 모르는 호남의 고립화가 걱정일 것이다.

지난 대선전 검찰 고위직을 지낸 한 호남출신 인사에게 '호남거주 호남인들과 서울에 정착한 호남인들의 정치인식 차이'를 물어본 적이 있다. 답변은 이랬다. "마피아가 시칠리아를 떠나 뉴욕에 간다고 마피아가 아닌 것은 아니제." 오랜 당쟁의 전통탓이겠지만 한국인들은 정권 향배를 자신의 안위와 연결시켜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 예컨대 영남인들이 국민의힘을, 호남인들이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내면의 이유중에는 반대쪽이 집권하면 자신과 자식의 가족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두려움이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그 피해의식은 오랜기간 소수파였던 호남쪽에서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 지난 대선때 광주·전라의 이재명후보 지지율은 83.98%였다. 서울에 자리잡은 호남출신은 어땠을까. 무슨 객관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관적 관찰의 결과에 기반해 나는 거의 비슷했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정당지지는 이념보다는 이익의 문제였다는 점에서 크게 틀릴수도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저렇게까지 엉망이 된 것은 '이익 비지니스'로서의 정당지지 구도가 영원불변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아무리 망가져도 호남이 있는한 망하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과 호남의 계산법이 반드시 같을 이유는 없다. 저 당을 계속 지지해서 양대 지역정당 체제가 이어지는 것이 호남에 유리할까. 이번 지방 선거와 내후년 총선 결과에 따라선 더불어민주당 당명이 바뀔수도 있고 윤석열 정부가 실점을 많이 하면 구도가 확 바뀔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호남이 숫적으로 소수인 상황에서 특정 정당에 '내새끼' 인증을 발급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한번 따져봐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을 포로로 삼는 현재 정치 구도를 깨고 싶을 것이다. 이런 식의 대립은 견제가 아니라 이익분점일 뿐이며 정치를 타락시킨다고 생각할 것이다. 윤 대통령이 지난주 광주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보편적 가치를 주장한 것은 호남을 보편성의 무대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제안이 아닐까.

그 제안을 호남은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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