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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위해 어민 쫓아낸 대형 간척사업들...앞으로도 그래야 할까 [김시덕의 이 길을 따라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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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27> 현대한국 문명의 충돌① 태안반도의 어민과 농민
한국일보

이번 회와 다음 회에는 현대 한국의 바다·강·산에서 일어난 '문명의 충돌'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한국의 공업화는 곧 '국토 개조' 과정이기도 했다. 이 국토 개조의 목적은 처음에는 '식량 자급'이었고 나중에는 '중공업 국가 건설'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바다가 농토로 바뀌고 농토가 공업단지로 바뀌어온 모습이,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한국 정부의 의지를 보여준다.

박정희의 꿈


식량자급을 위한 국토 개조는 곧 '조국 근대화'의 길이었다. 이를 상징하는 두 개의 유물이 경기도 수원시와 전라북도 부안군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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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녹색혁명성취 기념탑. 김시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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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옛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에는 '녹색혁명성취'라고 적힌 아래에 농민들이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77년에 식량 자립을 달성하고 세계 쌀생산 역사상 최고기록을 달성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그리고 이 시설과 인접한, 농촌지도자들을 훈련시키던 농민회관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1967년 발언이 머릿돌로 새겨져 있다.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또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치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 1967. 1. 17 대통령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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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도 간척지 머릿돌에 새겨진 박정희 대통령의 발언. 김시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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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에게 '조국 근대화'는 곧 '신앙'이었다. 그리고 그 '신앙'의 핵심은 농업이었다.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식량 자급을 실천하자는 것이 '조국 근대화'의 첫 번째 목표였다.

농민회관 로비에 새겨진 박정희 대통령의 이 말은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에도 남아있다. 이곳에는 한국 최초의 대규모 간척지인 계화도 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계화도 간척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신앙에서 핵심되는 농업을 위해 바다를 메운 곳이다. 그에게 간척사업은 곧 조국 근대화의 길이었던 것이다. 계화도 간척지가 만들어지기 전인 식민지 시기에는 군산시 서쪽에 열대자마을이라 불리는 간척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오늘날, 열대자마을과 계화도 간척지는 새만금 간척지의 북쪽과 남쪽 일부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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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도 간척지 경관. 김시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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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의 꿈


간척사업은 바다를 메워서라도 벼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조국 근대화' 신앙에 기반한 행동이자, 간척을 해서 국토를 넓혀야 한다는 사명감에 의한 것이었다. 태안반도 남쪽의 천수만을 매립해서 서산간척지를 만든 정주영 전 현대회장은 회고록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래 작은 국토나 그나마 반으로 잘려 더 작아진 우리 입장으로 볼 때 국토 확장은 필수적인 과제이다. 게다가 인구는 많고 식량 자급량도 절대 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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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도집 제2권에 실린 새만금종합계획 현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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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위의 인용문에 이어서 그는 "간척사업이라는 것이 해안선을 따라서 하는 것이므로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민들의 반발이 자동적으로 따르는 법"이라고 말한 뒤, 갯벌은 큰 경제적 가치가 없는 곳이라는 인식을 보인다. "간척지 대부분은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빠질 때마다 갯벌로 드러나는 곳이었다. 고기도 번식할 수 없는 그런 곳에 대단위 어장이라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는데도, 어민들은 어장을 망쳤다고 난리였다."

어민들이라면 갯벌에 대해 정주영 회장과는 다른 인식을 가질 것이다. 어민들이 인식하는 바다와 갯벌의 가치를, 농민 출신의 정주영 회장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다 특히 갯벌은 경제적으로 큰 가치가 없으며, 이를 간척해서 대단위 농토로 만드는 것이 더욱 큰 경제적·국가적 이익이라는 것이 그의 인식이었을 것이다. 이는 강원도 통천 농민의 아들인 정주영 회장뿐 아니라, 농촌을 고향으로 여기는 수많은 한국 시민들이 공유하는 인식이기도 할 것이다.

"식량만큼은 어떤 경우에도 자급자족이 돼야 한다. (중략) 경제성 있는 간척사업을 할 수 있는 한 계속해서 농토를 넓혀 농경지를 확장시키고 기계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농지는 작은데 기계화한다고 농기계만 자꾸 보급해봤자 공연히 농가의 빚만 늘리는 셈이다."

정주영 회장의 이러한 인식은 농민이던 아버지가 보여준 삶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내 어린 시절, 농사일, 농지 개발, 간척일 등을 통해서 아버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셨던 그 강인한 정신과 토지에 대한 애정은 참으로 숙연할 정도로 존경스러운 것이었다. 그런 아버님께 바치는 나의 존경의 헌납품이 바로 서산농장이다."

이 존경심이 지나치다 보니, 천수만 간척지의 국유지에 아버지의 동상을 세우려다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좌절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간척, 그리고 어민들의 반발


아버지 동상 건립 문제는 가십으로 끝났지만, 천수만 간척 사업이 추진되는 내내 어민 그리고 염전 관련자들의 항의가 계속되었다. 13명의 어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이 끝난 뒤인 1988년에는, 현대의 천수만 간척 사업 당시 정부가 어민들에게 동의를 강요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나는 현재 상태의 서해안 갯벌을 반드시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간척 사업이나 제방 사업을 한 뒤에, 시설 바깥으로 다시 개펄이 형성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메산골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지는 농업보다는, 정주영 회장이 추진한 현대 서산농장 같은 대규모 기계화 농업 또는 스마트팜에 한국 농업의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농민과 비농민 사이의 인식 차이가 지난 반 세기 동안 서해안에서 진행된 간척 사업에서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농업민과 비농업민의 갈등이라는, 인류 역사상 오래된 문명 충돌이 현대 한국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농민-비농민 갈등의 오랜 역사


이와 비슷한 일이 19세기 말 중앙아시아에서도 있었다. 내몽골이라 불리기도 하는 남(南)몽골 지역은 유목을 위한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청나라를 운영하던 만주인과 몽골인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19세기 말이 되자, 한인(漢人) 농민들이 남몽골 지역의 유목지로 대거 이주해서 농사를 시작했다. 한인 농민들의 눈에는 유목지가 쓸모없는 빈 땅으로 보였고,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놀려두는 몽골 유목민들은 그저 어리석은 자들로 비쳤다. 이들 한인 농민을 내륙화교(內陸華僑)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때 한인 농민들이 남몽골 지역을 대거 농업화시키면서, 여전히 유목이 산업이 중심이 되는 외몽골 즉 북몽골과의 분단이 심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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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육지의 일부가 된 충남 당진시 구지도. 현재도 옛 섬의 모습이 뚜렷하다. 류기윤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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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이 보여준 인식은 결코 독단이나 무지가 아니다. 이들은 농민으로서의 정체성으로 한국을 바라본 것이다. 농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세대에 의해 '조국 근대화' 사업은 추진되었고, 그 결과 한국은 보릿고개를 넘어섰다.

간척의 미래


하지만 농업 중심 세계관으로 국토를 개조하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식량 자급이 절실하다는 문제의식으로 새만금 간척이 시작되었지만, 그 사이 쌀은 생산과잉 상태가 되었고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농업용 간척지뿐 아니라, 공업단지를 유치하기 위해 조성한 간척지도 그 후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는 대폭 성장하지 않으리라는 전제에서 국가 전략을 짜야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 많은 간척이 필요할지는 의문이다. 더 많은 바다를 간척하기 전에, 현재 비어있는 간척지를 우선 채우고 효율적으로 활용할 궁리를 해야 한다. 앞으로 간척 사업은 인천 부산 등 고질적인 토지 부족에 시달리는 일부 대도시권과 그 주변 지역에 한정해서만 경제적 가치가 있으리라 예측한다.

지난 60년간 태안반도에서 진행된 간척사업은,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의 발언이 상징하는 농업 제일주의가 비농민을 압도한 문명적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쌀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농업 제일주의는 조선시대부터 현대 한국까지 변함없이 이어져왔다.

'홍어장수 문순득'의 사례는 이러한 농업 중심 세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문순득 일행은 1801년 소흑산도에서 배를 타고 나섰다가 표류해서 오키나와, 필리핀 루손, 마카오, 청나라를 거쳐 1805년에 귀국했다. 조선에서 청나라로 파견되었다가 1804년 문순득을 만난 사절단은 이런 시를 지어 어민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농업을 전향시키려 했다.

"흑산도 민속은 매우 어리석어 바다에서 이익을 쫓느라니 대부분 곤궁하구려 (중략) 원하노니 네 고향에 가거들랑 농가에 안식해서 농사나 힘쓰게나" ('계산기정' 수록 '표류주자가(漂流舟子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2년 기획특별전 '홍어장수 문순득 아시아를 눈에 담다' 수록 번역). 국가의 근원을 쌀과 쌀을 생산하는 농민에 둔 동중국해 국가들의 지배집단이 전형적으로 보여준 농업 중심적 세계관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농업과 어업 어느 한쪽이 옳고 다른 한쪽이 그르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농업 중심 세계관이 한반도 주민의 정신을 지배한 결과, 바다와 강과 산에서 활동해온 사람들, 그리고 농토에 붙어서 살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상인과 유랑인들의 존재를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농업 중심의 세계관은 바다에서는 간척을 통해, 강에서는 댐과 하구언을 통해, 그리고 산에서는 산림녹화사업과 화전정리사업을 통해 비농민들을 줄여나갔다. 한강과 영산강을 통해 서해 바다와 이어져 있던 서울 용산과 나주 영산포는, 하구언이 생기면서 내륙 항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남한강 유역의 이포·흥원·문막·목계·가흥·목행·단양 등도 충주댐 건설 등으로 인해 항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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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시 오도의 '당진 축항 준공 기념비'. 김시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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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당진 북부에는 오도와 구지도라는 섬이 있었다. 이 두 곳에는 서로 다른 성격의 기념비가 있다. 오도에는 식민지 시기에 세워진 '당진 축항 준공 기념비'가 있다. 이 비석의 뒷면에는 '인천 기선 주식회사'가 당진항 공사를 후원했음을 알리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 후 오도 북쪽이 모두 매립되면서 인천과 당진항 간의 뱃길은 끊겼다. 한때 배를 이용해서 인천 등 외부 세계와 빠르고 편리하게 이어지던 오도 일대는, 뱃길이 끊기면서 교통이 불편한 벽촌이 되었다. 신흥개발회가 구지도 일대의 바다를 메워 농토로 바꾼 사실을 기념하는 '구개야 개척자 공적비'는 어촌이자 교통의 요지이던 태안반도가 한적한 농업 지역으로 바뀌었음을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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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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