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광주 시민입니다.”
18일 오전 10시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거행된 제42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의 1174자 기념사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미리 배포된 기념사엔 없는 문장이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광주로 향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즉석에서 포함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 열여섯 글자 안에 윤 대통령의 특별했던 이날 하루가 모두 축약돼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18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42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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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실 설명에 따르면 이 문장의 모티브는 1963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연설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당시 동서 냉전의 상징인 독일 베를린 시청 앞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이다’ 였지만 이제 자유 세계에선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 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인은 그들이 어디에 살더라도 베를린 시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자유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윤 대통령이 이날 광주에서 발신한 메시지 역시 5·18 자유 시민 정신의 확장이 핵심이다. 42년 전 광주 시민을 자유인으로 규정한 뒤, 지금 직면한 자유민주주의 위기 또한 그때 정신을 가지고 와서 함께 극복해 나가자는 뜻이다.
윤 대통령의 행보는 오전 7시 30분 서울역에서 새 정부 장관과 대통령실 참모진, 국민의힘 의원 등 100여명과 함께 광주행 KTX 특별열차에 탑승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그것도 보수정당 출신 대통령과 당정 인사들이 총출동한 건 전례가 없다. 열차가 출발하자, 윤 대통령은 참석자들에게 “국민통합의 길에 함께 해줘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8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집무실에서 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를 직접 퇴고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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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50분, 광주 국립5·18민주묘지 앞.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를 한 윤 대통령이 민주묘지의 정문인 ‘민주의 문’을 통과했다. 이 3칸짜리 기와 건물 대문을 통과한 건, 보수정당 출신 대통령으론 그가 처음이었다. 옆에는 5·18 희생자 유가족들이 함께했다. 이어 방명록에 ‘5월의 정신이 우리 국민을 단결하게 하고 위기와 도전에서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오전 10시 30분. 마스크를 벗은 윤 대통령이 터벅터벅 단상에 오르자 연신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그는 기념사에서 광주를 두고 “민주화의 성지”라고 표현했다. 5·18 항쟁은 “42년 전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피로써 지켜낸 항거”라고 했다. 이어 꺼낸 게 ‘5월의 정신’이었다. 윤 대통령은 “5·18은 현재도 진행 중인 살아있는 역사”라며 이를 2022년 5월 대한민국의 무대로 이끌어냈다. “5월 정신은 지금도 자유와 인권을 위협하는 일체의 불법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할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며 “우리 모두가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당당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 누구의 자유와 인권이 침해되는 것도 방치돼선 안 된다. 함께 지켜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기념사를 하는 윤석열 대통령. 대통령실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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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취임사 때 ‘자유’를 무려 35번 말했던 윤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도 자유를 12번 언급했다. “5월 정신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라거나, “대한민국이 새로운 도약을 이뤄가는 여정에도 자유민주주의의 산실인 광주와 호남이 앞장설 것이라 확신한다”는 등으로 5·18과 자유 민주주의를 연결지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저는 5월 정신을 확고히 지켜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날 기념사는 윤 대통령이 직접 퇴고를 7차례 했다고 한다. 이 중 직접 파란색 펜으로 추가한 부분이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는 우리 국민을 하나로 묶는 통합의 철학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를 피로써 지켜낸 5월의 정신은 바로 국민 통합의 주춧돌입니다”라는 대목이었다. 윤 대통령의 생각은 5·18 정신→자유민주주의 수호→대한민국 통합으로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이날 기념사를 마친 윤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과거 보수 정부에선 합창단 합창으로 대체하던 것과 크게 대비됐다. 옆 사람과 손잡고 위아래로 크게 흔들면서 함께 불렀는데, 노래할 때마다 마스크가 펄럭거렸다. 장관들도, 여야 정치인들도 손을 맞잡거나, 오른손 주먹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이날 CBS라디오에 출연해 대통령실과 당·정 인사가 광주에 총집결한 것에 대해 “쇼라고 하더라도 잘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국민을 통합하려는 자세”라고 평가했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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