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의제' 문구로 신경전도
1971년 8월 20일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 당시 남북대표 대화록. 통일부 제공 |
분단 이후 남북 당국 사이 최초 합의서가 당초 알려진 1972년 7ㆍ4 남북공동선언보다 약 1년 앞선 1971년 9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때 쓰여진 것으로 확인됐다. 통일부는 4일 남북적십자회담 준비 과정이 수록된 남북대화 사료집 제2ㆍ3권을 공개했다. 남북회담 기록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이다.
통일부가 이날 공개한 1,652쪽 분량의 문서에는 1970년 8월부터 1972년 8월까지 진행된 25차례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회의 내용이 담겼다. 1971년 8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사무실에서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으로 시작된 논의는 1945년 분단 후 남북이 공식 석상에 마주 앉은 첫 사례였다. 역사적 만남은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1971년 8월 12일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제네바 회담을 제안하고, 손성필 북한적십자회 위원장이 이틀 뒤 판문점 회담으로 수정 제안해 성사됐다.
26년이라는 단절의 시간이 말해 주듯, 남북은 첫 만남에서부터 긴장감을 자아냈다. “안녕하십니까(남측)” “동포들과 서로 만나니 반갑습니다(북측)”라는 짧은 인사가 사실상 전부였다. 첫 회담 시간도 낮 12시 1분부터 4분까지 고작 3분에 불과했다. 통성명과 신임장 교환이 끝난 뒤 “수해가 많이 안 졌느냐(많이 나지 않았느냐)”는 우리 측 질문에 북측은 “수해가 없었다”고 짧게 답했고, 이어 “아, 그러냐”는 반응에 “그러면 우리 임무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본다”며 첫 접촉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양측 파견원들은 엿새 뒤 같은 장소에서 이뤄진 2차 접촉부터는 날씨나 자녀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는 등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한 달이 지난 그해 9월 29일 남북적십자 제2차 예비회담에서 ‘적십자 예비회담 진행 절차에 관한 합의’가 체결됐다. 회담 장소와 시설 등 절차를 정한 정도지만 남북 간 첫 합의서로 기록됐다. 훗날 오랫동안 활용될 남측 ‘자유의 집’, 북측 ‘판문각’에 상설 회담 연락사무소를 두고 이를 연결하는 직통 왕복 전화를 설치한다는 내용도 합의서에 적시됐다. 통일부 당국자는 “남북 당국 간 최초 합의서로 지금까지 남북회담 운영의 기본 틀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듬해인 1972년 6월 5일 열린 예비회담 제13차 의제문안 실무회담도 눈길을 끈다. 이 회담에서 남북은 적십자 본회담에서 논의할 5개 의제를 채택했는데,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관한 최초의 합의였다. 회의록을 보면, 양측은 2항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 사이의 자유로운 방문과 자유로운 상봉을 실현하는 문제’ 문구를 놓고 “‘자유로운’을 두 번 표기해야 한다”는 우리 측 주장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북측이 맞서는 등 팽팽한 기싸움을 연출했다.
이번 문서 공개는 올 1월 제정된 ‘남북회담문서 공개에 관한 규정’에 따른 것이다. 공개 대상 문서는 남북회담본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자료센터 등 3곳에 마련된 남북회담 문서열람실을 방문하면 볼 수 있다.
정준기 기자 j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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