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바르샤바 정철환 특파원 르포
“러시아가 우릴 눈뜨게 해줬다”
우크라 지도 세워놓고… 폴란드 대통령 손잡은 미국 바이든 -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과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 25일(현지 시각) 폴란드 야시온카에 마련된 회의장에서 만나 손을 맞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날 두 정상은 난민 지원 등 인도적 지원 문제에 관해 논의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두다 대통령에게 “당신들의 자유가 우리의 자유”라고 말했다. /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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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해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시내 곳곳에 펼쳐진 우크라이나 국기의 물결이었다.
26일(현지 시각) 바이든 대통령이 묵고 있는 브리스톨 호텔 앞길에는 약 2㎞에 걸쳐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국기가 내걸렸다. 시내 중심가 스베엔토크지스키 거리의 한 건물은 벽면 전체에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와 함께 한다(Poland stands with Ukraine)”는 초대형 문구를 붙였다. 기업들은 광고판에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고 적힌 응원 광고를 실었고, 가게 점원들은 우크라이나 국기를 배지로 달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한 폴란드와 폴란드인의 삶은 180도 뒤바뀌었다.
극우 민족주의가 득세하며 반(反)유럽연합(EU), 반(反)난민을 외치고 EU 탈퇴설까지 거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바르샤바대학 앞 노비 슈비아트 거리에서 만난 아르만덱(39)씨는 “폴란드가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일원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며 “(폴란드의) 흐렸던 눈이 다시 떠졌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의 무차별 공격에 도시들이 불타고, 수만 명의 난민이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눈앞에 닥친 ‘침략’의 공포를 절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우 성향의 집권당 ‘법과 정의당(PiS)’도 연일 “EU·나토와 단결해 러시아의 야욕에서 폴란드를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PiS는 언론 탄압과 법치 파괴, 난민 거부 등의 문제로 EU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었다. 바르샤바 중앙역 옆 메르퀴르 호텔에서 만난 도브로밀(51)씨는 “유럽엔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던 몇몇 좌파 정치인들의 말은 거짓말이었다”고 했다. 그는 “이제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전쟁 전의 ‘평화에 취해 있던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폴란드는 18세기 후반부터 주변 강대국에 의해 나라의 주권이 침해당한 비극의 역사가 각인돼 있다. 특히 러시아의 지속적인 간섭과 침략으로 나라가 여러 번 없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20세기에는 1919년 소련·폴란드 전쟁, 1939년 소련과 독일의 동시 침공으로 양국에 흡수 합병되고, 인구의 20%가 희생당했다. 전쟁 후에는 소련의 개입으로 공산 국가가 됐고, 1980년대 자유 노조 운동으로 공산당이 실각하기 전까지 소련의 위성국으로 살았다. 수세기 동안 폴란드의 독립과 자유를 억압해 온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높을 수밖에 없지만, 탈(脫)냉전으로 찾아온 30여 년간의 유화적 국제 정세 속에 러시아에 대한 경계감이 크게 약화됐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폴란드인들은 러시아를 다시 직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남다른 연대감도 드러내고 있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오늘은 우크라이나지만, 내일은 폴란드일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 피란민은 우리의 손님이자 형제, 이웃”이라고 선언했다. 전쟁 발발 이후 27일까지 폴란드로 넘어온 우크라이나 난민은 230만명에 이른다.
바르샤바에서는 호텔, 미장원, 수퍼마켓 등에서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미장원 체인점 ‘헤어컷 익스프레스’에서 일하고 있는 다리냐(40)씨는 “지난달 28일 지토미르에서 아들과 딸 둘을 데리고 넘어와 바르샤바 외곽에 작은 방을 얻어 살고 있다”며 “우크라이나에서 싸우고 있는 남편이 무사하기만을 매일 기도하고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우크라이나에 가까운 동부 국경 도시 제슈프와 프세미실은 군수품과 난민의 거대한 교차로가 됐다. 서방의 지원 군수품을 실은 군용 트럭들이 매일같이 이 도시들을 지나 우크라이나로 가고 있다. 그 반대 방향으로는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이 쏟아진다. 폴란드 국경 수비대 측은 “메디카와 크라코베츠 검문소, 프세미실 기차역 등 주요 관문을 통해 지난 10일간 하루 평균 4만명의 난민이 폴란드로 넘어왔다”고 밝혔다.
이들은 제슈프와 바르샤바 등 폴란드 주요 도시의 난민 수용소에 3~5일간 머물다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 절반은 폴란드에, 나머지 절반은 독일과 프랑스, 체코 등으로 가고 있다. 제슈프에서 만난 피란민 나탈카(47)씨는 “처음에 국경을 넘어 바르샤바까지 갔다가 휴전에 희망을 걸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며 “하루빨리 내 집으로 돌아가 국경에서 헤어진 아들 둘을 만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바르샤바=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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