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들었던 20대들 “나아진 것 없는 삶에 지쳐 이념보다 실리 선택”
“너무나 많은 싸움에 20대들 질려버려… 정치권, 갈등 해결 노력해야”
치열했던 20대 대선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당선으로 마무리됐다. 부동산 가격 폭등과 취업난 등으로 힘들어하는 20대 청년들은 입을 모아 ‘통합의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외침을 전한다. 사진은 2월 12일 전남 여수시 유세 도중 청년 지지자로부터 손편지를 전달받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 사진: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요새 친구들끼리 ‘서울에 이렇게 집이 많은데 왜 내 집은 없냐’는 말을 자주 해요. 주택 공급도 해결되지 않았을뿐더러 집값, 전월세가 다 올라버렸잖아요.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봤자 서울은커녕 수도권 안에 내 몸 둘 곳 하나 마련할 수 있을까 싶은 거죠.”
대학생 장지웅(22)씨는 문재인 정부 5년간 가장 큰 실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장씨는 “새 정권이 들어섰다고 해서 부동산 문제를 단숨에 잡을 수는 없겠지만, 현 정권의 정책이 미흡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달라는 국민의 기대와 함께 청와대에 들어섰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취임사에 국민의 기대는 더욱 커졌다. ‘평등·공정·정의’를 강조한 문 대통령의 취임사는 국정농단 사건을 통해 발현한 국민의 요구 자체였다. 2016년 10월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운 촛불 시민들은 “공정하고 더 나은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외쳤다.
국정농단 사건은 대표적인 정치 무관심층이었던 20대 청년들의 의식을 깨웠다. 대학원생 이재준(25·가명)씨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던 광화문 광장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집회를 찾아가는 동안에도 솔직히 ‘뭔 소용이 있을까’ 의심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막상 도착해서 보니 ‘이게 학교에서 배우던 민주주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이씨는 “꾸준히 열리는 집회와 변해가는 세상을 보며 우리나라가 더 좋은 나라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촛불을 든 국민은 탄핵 후 치러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 대통령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득표율 2위인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와 17.05% 차의 대승이었다. 이재준 씨는 첫 대선 투표에서 문 대통령에게 투표했다. 이씨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문 대통령이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표를 던졌다”고 전했다.
━
2번째 대선 투표한 20대들… “소신 접고 차악 선택해”
스스로 세상을 바꾼 경험을 얻게 된 청년들은 5년 뒤 어떻게 달라졌을까. 19대 대선에서 각각 문 대통령과 심상정 정의당 후보에게 표를 줬던 이재준씨와 대학생 문지영(26·가명)씨는 생애 두 번째 대선에서 지난번과 다른 선택을 했다. 이씨는 민주당을 지지했던 입장을 바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그는 “지지 정당을 바꾼 것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했다”고 했다. “희망하는 직종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의 공약을 내세운 후보를 선택할 수 없었다. 투표 전 ‘무엇이 옳은지’보다 ‘내 밥그릇을 누가 지켜줄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게 이유였다.
문씨도 이번 대선에 재차 출마한 심상정 정의당 후보 대신 다른 후보를 택했다. 여전히 심 후보와 정의당을 지지하고 있지만 특정 후보의 당선만큼은 막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기 때문이다. 문씨는 “차악을 선택하는 마음으로 다른 후보에게 투표했다”며 “실제로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주지 못해 씁쓸한 기분”이라고 전했다.
‘2030의 반란’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번 대선에서 청년들의 투표 성향은 과거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른바 ‘스윙보터’로서 이념 대신 실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20대의 지지 후보·정당의 변동, 즉 ‘스윙보트’ 현상이 당연하다고 분석한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20대는 특유의 실용적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고 했다. 채 교수는 “19대 대선에서 박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해 분노했다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가격 폭등, 조국 전 장관 일가족 문제 등 불공정 이슈에 대한 분노가 표심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2030 청년층, 특히 20대는 586세대에 비해 유연하다”고 설명한다. 임 교수는 “50대의 경우 민주화운동에 직접 참여해 민주화를 이뤄낸 경험이 있어 이념적 편향이 굉장히 강하다. 반면 60~70대 장년층은 산업화의 역군인 동시에 박정희 정권 때부터 우익 성향을 유지해왔다”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 “현재 20대는 이러한 이념적 편향으로부터 자유롭다. 대신 자신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는 세대”라고 덧붙였다.
‘비호감 대선’이라 불릴 만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 이번 대선의 가장 뜨거운 키워드 중 하나는 ‘이대남(이십대 남성)’, ‘이대녀(이십대 여성)’다. 지난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이대남의 보수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이대남 공략을 대선 승부처로 삼기도 했다. 이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조직화하며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떠올랐다.
이에 맞서 이대녀도 선거 막판 집중 조명을 받았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 반감을 드러내면서 이재명 전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줬다. 이 후보가 3월 4일 80만 명이 회원 가입한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 ‘여성시대’에 방문하면서 결집력이 강해지더니 초박빙 대선으로 이끄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20대 대선은 사전투표제도 시행 이래 가장 높은 36.93%를 기록했다. 사전투표 첫날인 4일 오전 부산 연제구청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 사진: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이대남·이대녀 프레임의 가장 큰 피해자는 ‘20대’
정작 당사자인 20대 청년은 남녀를 가르는 프레임이 달갑지 않다. 일부 정치 고관심층의 특징을 일반화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다. 장지웅씨는 “피부로 느끼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갈라치기’”라고 지적했다. 장씨는 “20대는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진 개인의 집합인데 이들을 이대남과 이대녀라는 단어로 묶어버리는 것은 서로 갈등을 조장하는 것뿐”이라고 불쾌해했다. 서주희(26)씨도 “정치인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있는 소수 의견을 확대해 전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왜 커뮤니티만 들여다보면서 갈등을 부채질하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한 번 굳어진 이대남·이대녀 프레임은 젠더 이슈로 확산하면서 갈등을 더 심화했다. 박정석(25·가명)씨는 “5년 전과 비교했을 때 젠더 갈등이 심해진 것을 체감한다”며 “온라인 커뮤니티의 글들을 보면 확실히 관점이 고착됐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인철(23)씨는 “젠더를 사이에 두고 양극으로 갈라진다면 지금보다도 갈등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젠더 갈등이 이전에 없었던 건 아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16년 5월 강남역 건물 화장실 안에서 여성을 아무 이유 없이 살해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하나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대표적인 여성 혐오 범죄로 꼽히며 젊은 여성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문 대통령도 이를 의식해 당시 대선 정국에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선언이 실제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냈는지에 대해서는 여성들조차 부정적이다. 문지영씨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정책적인 면에서 효과를 체감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이예은(21·가명)씨도 “의도는 이해하나 결과적으로는 남성들의 반발심만 더욱 키웠다”고 꼬집었다.
문 대통령의 ‘페미니즘’ 옹호 발언은 되레 일부 남성들의 반감을 키우기도 했다. 전문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박성수(26)씨는 “과거 여성징병제가 처음 이슈로 떠올랐을 때 문 대통령은 ‘재밌는 이슈’라고 답한 적 있다.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처럼 20대 남성에겐 남성에게만 부과되는 의무 복무 문제도 피부로 와닿는 젠더 문제”라며 “재밌는 이슈 정도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년들의 젠더 갈등이 온전히 2030의 책임이라 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정치권과 언론의 갈등 부추기기가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과거 정치권이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잣대로 피아(彼我)를 구별해 표심을 모았던 것처럼 이념에서 자유로운 청년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젠더 문제를 증폭해 ‘내 편 네 편’을 갈라치기했다는 것이다. 이에 더불어 언론도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피상적인 논쟁을 중계하면서 갈등을 키웠다는 분석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미디어 노출이 높은 상황에서 일부 의견이 마치 20대 남녀 전체의 주장처럼 알려지고 있다. 이는 곧 청년에게 ‘나도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형태로 주입된다”고 지적했다. 곽 교수는 “이번 대선에서는 갈라치기식 정치가 서서히 커지던 젠더 갈등에 불을 지른 셈”이라며 “20대를 심각한 피로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임 교수도 “이대남·녀 프레임은 소수의 선동과 정치인의 양극화 시도가 맞물린 결과물”이라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비교우월이론에 따르면 내가 불안한 상황에서 타인을 배타적으로 대할수록 안정감을 느낀다”며 “정치권 등에서 이를 부추긴 면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부동산 폭등·취업난 등으로 불안한 청년들이 초기엔 이러한 프레임에 동조했을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마타도어가 이어지면서 지쳐버렸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질리도록 싸운 5년… “갈등 멈추고 대통합 이뤄주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대 대선이 윤 당선인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윤 당선인과 이재명 전 후보의 당락이 불과 0.73%, 24만 표 차이로 갈려서다. 특히 높은 정확도를 보인 지상파 방송 3사의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 이하 남녀의 지지 후보는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18~29세 남성은 윤 당선인에게 58.7% 지지를 보낸 반면, 여성 58.0%는 이 전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양분된 표심에 대해 전문가들은 갈라치기식 전략을 원인으로 제시한다. 채 교수는 “이번 대선 캠페인 자체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민의힘과 이준석 대표는 군 관련 문제, 안티 페미니즘 등의 슬로건으로 20대 남성을 자극해 결집시켰다”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전했다.
표심은 양극을 향했지만, 20대가 원하는 건 갈등을 부추기는 대신 중재하는 통합의 리더십이라고 강조한다. 싸움과 혐오로 가득했던 5년을 묻어두고, 다시금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성수씨는 “국민통합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을 원한다”고 말했다. “청년과 중장년층, 남자와 여자, 영남과 호남 등 너무 많이 갈라져 있다”고 지적한 박씨는 “개개인의 다양한 생각이 존중받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첫 대선 투표를 치른 장지웅씨는 “치우치지 않는 유능한 대통령”을 바란다고 했다.
통합을 강조하는 20대들의 목소리에는 짙은 피로감이 배어 있다. 채 교수는 “상대를 향한 네거티브가 많았던 만큼, 청년들도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채 교수는 “20대도 지금 처해 있는 취업난과 부동산 문제를 정치권에서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며 “어쩌다 보니 그 분풀이를 서로에게 해온 셈”이라고 설명했다.
곽 교수는 “과거보다 갈등의 양상이 더욱 세분화되고 가짓수도 많아진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곽 교수는 “너무나 많은 싸움에 20대가 말 그대로 질려버린 상황”이라며 “정치인들이 다양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이민준 월간중앙 인턴기자 19g2970@naver.com
▶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