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아(11)와 아일리샤(7)가 10일(현지시각) 낮 폴란드 프셰미실에서 크라쿠프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타 함께 창밖을 구경하고 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국경을 넘어왔다. 프셰미실 난민 쉼터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됐다. 아일리샤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아빠가 가장 그립다”고 말했다. 폴란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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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기차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승강장으로 들어왔다. 폴란드 남동부 국경의 소도시 프셰미실에서 제2도시 크라쿠프로 출발하는 열차다. 아이·어른 할 것 없이 저마다 커다란 짐, 작은 짐을 끌고, 메고, 들고 바쁘게 움직였다. 우크라이나 서부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이 역은 지난달 24일 전쟁이 터진 뒤 매일 난민들로 붐빈다. 열차의 승객들은 9할 이상이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곳을 출발하는 열차는 난민들을 다른 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난민 열차’와 다름없다.
10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 출신 안나(37)도 이 기차에 탔다. 그는 러시아군이 전쟁을 선포한 바로 그날 두 딸과 함께 집을 떠났다. 안나는 그날 아침을 잊을 수 없다. “7시쯤이었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을 듣고 잠에서 깼어요. 차량 경보 소리가 들렸어요. 누가 차에 억지로 들어가려고 할 때 나는 시끄러운 소리 있잖아요. 창문으로 다가가 무슨 일인지 보려고 했어요. 너무 어두웠어요. 잘 안 보였어요. ‘진정해.’ 남편이 말했어요.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갔지만 잠에 들 수 없었죠. 폰으로 뉴스를 찾아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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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제2도시로 가는 열차승객
대부분은 우크라 난민
“매순간 매시간 뉴스 체크
전쟁이 시작됐지만 안나는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후 들어 ‘잘못하면 아이들을 데리고 못 떠나는 거 아냐?’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남편이 16시간 차를 몰아 서부 지역에 데려다줬다. 남편은 참전을 위해 키이우로 돌아갔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자료를 보면, 전쟁이 시작된 뒤 12일(현지시각) 현재까지 국경을 넘은 우크라이나 난민은 269만8280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폴란드로 넘어온 이들이 3분의 2를 넘는 165만여명(13일 현재)이고, 다른 이들은 헝가리(24만여명), 슬로바키아(19만여명)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필리포 그란디 유엔난민기구 최고대표는 3일 성명에서 “40년 가까이 난민 문제에 매달려왔지만, 이처럼 급속한 탈출 행렬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발생한 난민 수로만 본다면, 유럽의 우경화를 이끈 2015년 ‘시리아 난민 위기’(약 100만명)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테르노필에서 온 난민 나디아(28)는 10일(현지시각) 아들 빅토르(10), 보단(9), 딸 아드리아나(2)와 함께 크라쿠프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폴란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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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웃나라에서 벌어진 끔찍한 전쟁을 자기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지, 유럽 각국이 보이는 모습은 당시와 큰 차이가 있다. 폴란드 정부는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기차 등 교통편을 무료로 제공하고, 유럽연합(EU)은 피난민들이 입국 후 간단한 절차를 거쳐 피난민들이 취업하거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제도를 신속히 정비하고 있다.
차가운 바깥 공기와 달리 기차 안은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난방열과 사람들의 복작거림으로 온기가 넘친다. 어른도 아이들도 두꺼운 겉옷을 벗고 땀을 식힌다. 한 꼬마는 8명이 서로 마주보며 앉는 칸에 엄마, 형, 누나와 같이 끼어 탔다. 엄마 무릎 위에 앉아 빵을 만지작거렸다. 쉼터에서 받은 빵과 귤, 수프가 든 비닐봉지를 연다. 한 엄마는 자리에 아기를 눕히고 기저귀를 갈았다. 어느 소녀는 엄마 어깨에 잠시 기대 눈을 감았다. ‘야옹~’ 저 멀리 다른 칸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털이 복슬복슬한 개 한 마리는 주인 옆에 엎드려 코를 드르릉 골았다.
어떤 소녀들은 달리는 기차의 차창에 달라붙어 낯선 풍경에 넋을 잃었다. 안나의 작은딸 아일리샤(7)도 기차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신이 났다. 남편의 차를 타고 서부로 이동한 안나가 바로 국경을 넘은 것은 아니었다. 전쟁 이튿날인 25일부터 2주 가까이 서부 지역 한 이웃의 집에서 기다렸다. “전쟁이 금방 끝날 줄 알았어요.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아이들을 위해 좀 더 안전한 곳으로 가야겠다 생각했어요.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요. 상황을 지켜보다가 다른 유럽 나라로 가려고 해요.” 국경 안에 남아 있는 ‘국경 안 피난민’들 역시 13일 현재 185만명에 이른다.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온 안나가 <한겨레> 취재진에게 자신의 집과 5㎞ 정도 떨어진 지역에 있는 민간인 주거지역의 전쟁 전후 비교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폴란드/노지원 기자 |
동남부 마리우폴은 포위망 갇혀
러, 생필품 차단해 항전의지 꺾기
민간인 ‘대피 회랑’ 안전도 위태
외교적 협상은 여전히 진전 없어
민간인을 대피시키기 위한 ‘인도 회랑’이 개설됐다는 소식이 이어진다. 하지만 주변 지역에서 전투가 이어지는 통에 피난민들의 안전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고 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를 포위해 식료품·의약품 등의 보급을 차단하고 폭격을 거듭해 우크라이나인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으려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시리아 내전에 참전했던 러시아군이 북부 제2도시 알레포 탈환 등에서 사용했던 방식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12일 기자회견에서 “몇몇 작은 도시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침통하게 말했다.
난민 열차 안 사람들도 실시간으로 고국의 상황을 휴대전화로 확인하며 긴 한숨을 내쉰다. “그날 이후로 매 순간, 매분마다 뉴스를 체크해요. 잠들 때는 너무 무서워요.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를 확인하는데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정말 겁이 나요.” 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1분에 한번씩 페이스북 메신저를 켜요. 남편이, 남동생이 몇분 전에 접속했는지 확인해요. ‘1시간 전에 활동 중.’ 아, 아직 괜찮구나. 안심해요.” 안나가 앨범을 열어 남편 그리고 남동생의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 남편 뒤로 군복을 입은 동료들이 보였다. 남동생은 스스로 군복을 입었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출신 안나(37)가 10일(현지시각) 낮 폴란드 프셰미실에서 크라쿠프로 향하는 열차에서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있다. 전쟁이 나기 전 키이우에서 사진작가로 일했다. 그는 언제쯤 다시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폴란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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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가 열차를 타고 폴란드 다른 도시로 이동한 10일 지중해에 면한 터키 남부 도시 안탈리아에선 개전 후 처음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의 회담이 열렸다. 기대했던 성과는 없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은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어떤 진전도 없었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해오던 말을 거듭했다”고 말했다. 쿨레바 장관은 “결코 항복하지 않겠다”고 항전 의지를 다졌다.
국제사회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생필품이 떨어진 채 러시아의 포위망에 갇힌 마리우폴 시민 40여만명의 운명이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보고서를 보면 러시아군의 기반시설 공격으로 마리우폴은 전기나 온수를 쓸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9일에는 러시아군이 마리우폴에 있는 산부인과와 어린이 병원에 공습을 감행해 여자아이를 포함해 민간인 3명이 처참히 희생됐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그 산부인과는 이전에 (우크라이나) 과격파에게 점령됐던 곳”이라고 말했고, 주영 러시아대사관은 이날 피투성이가 된 채 구조된 임신부에 대해 “모델의 연기”라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역시 12일 프랑스·독일 정상과 한 통화에서 민간인 피해가 커지는 것은 우크라이나 과격분자 탓이라고 했다.
“너 이름은 뭐야?” “빅토르!” 난민 열차에서 만난 아이들은 금세 친해졌다. 기차 안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다. 이들의 여행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프셰미실 크라쿠프(폴란드)/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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